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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Jan 28. 2024

평등한 결혼은 온 가족의 노력이 필요하다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가족과 친척들은 물론이고 꽤 많은 친구들이 '니가 결혼할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다. 그도 그럴 게 비혼주의라는 단어가 없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비혼주의자였다. 결혼을 절대 하지 않겠다고 떠들어댔다. 어렸을 적부터 주변의 결혼은 내게 이상적인 미래가 아니었다. 뭐랄까, 결혼을 하게 된다면 스스로 나를 가두게 될 것만 같았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순 없었지만 대체로 이런 느낌이었는데, 나의 언어가 생겨가며 이유들을 조금씩 정리할 수 있었다.


대체로 가부장적인 문화의 도시에서 자란 내게 결혼은 온통 불평등의 산물 같았다. 가사 노동부터 생계와 양육은 물론이고 서로가 지어야 하는 책임, 그리고 심지어는 서로를 지칭하는 언어까지 모든 게 불평등해 보였다. 어른들은 '저러다 스무 살 되면 결혼하겠다고 난리 친다'라고 입모아 말했으나 안타깝게도 페미니스트 20대가 된 나는 더더욱 결혼이란 대책 없이 불평등한 제도임에 불과하다고 종결해 버린다.


그런 내가 결혼을 꿈꾸게 된 건 지금의 애인 때문이다. 나를 구성하는 것, 나를 이루는 것들은 다양하다. '페미니스트' 하나만으로 나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그럼에도 한참 나의 페미니즘에 대한 갈망이 가장 뜨거웠을 무렵 애인을 만났고 우리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온갖 주제로 대화를 나누니 결혼 제도에 대한 토론 역시 자연스럽게 나누곤 했다. 그러다 우린 함께 살게 됐고 그 시간이 길어지면서 결혼이라는 제도에만 묶이지 않았을 뿐 실제론 결혼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며 어쩌면이라는 가능성을 처음 떠올리게 됐다.


그렇지만, 결혼은 가족이 얽힌 문제다. 그랬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처럼 함께 마련한 따스한 공간에서의 둘의 낙원과 평안이 행복했을 뿐. 그런데 애인의 가족 문화는 내가 나고 자란 도시에서 숱하게 봐온 가족들의 문화와 판이했다. 우리의 대화는 남들이 하는 결혼 제도에서 우리가 꾸리고 싶은 결혼 문화로 옮겨 갔다. 또 한 번 어쩌면을 떠올리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나의 사고와 언어 역시 좀 더 성숙해져 갔다. 30대가 된 나는 문득 이 문제 가득한 제도를 포기하거나 거부하고 싶지 않아 졌다. 약간 좀 자존심이 상한달까. 내가 도망치거나 포기하는 게 아니라 맞서 싸우든 바꾸든 아니면 새로운 제시를 하든 하고 싶었다. 그랬기에 애인이 '이제 너와 가족이 되고 싶다'라는 말을 했을 때 이 말보다 더욱 로맨틱한 청혼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선택한 가족, 함께 만들어가는 가족의 모습. 나도 지금의 애인과 가족이 돼 우리의 문화를 만들고 싶었다.


복병은 우리 가족이었다.


우리 가족은 한동안 내 결혼을 두고 계속해서 딸을 보낸다라거나 이제 남의 가족이 된다는 류의 서운함을 내비쳤다. 그럴 때마다 난 너무나 황당한 얼굴로 나는 어디에 가는 것도 아니며 남의 가족이 되는 것도 아니며 지금 이 상태 그대로 살 것이기 때문에 결혼을 결심한 것이라 답했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눈물을 글썽이신다.


애인을 위해 아침도 안 차려주냐며 나를 혼내시고 급기야는 당사자들이 이미 합의한 애인 형네 부부와의 호칭 문제를 지적했다. 우리는 일찍이 서로 이름을 존칭으로 부르기로 하였으나 우리 부모님은 그런 게 어딨냐며 내게 아주버님과 형님으로 부를 것을 명령하셨다. 오빠(애인의 형이자 나의 학교 선배)는 내 이름을 부르며 반말하는데 그럼 나도 '아주버'라고 하겠다 하니 그게 대체 무슨 버릇이냐 꾸짖었다.


이 글을 쓰게 된 건 오늘은 상견례 날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입장을 낮추었다. 그 이유는 딸 가진 부모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계속해서 딸 가진 집안에서 먼저 무언갈 해드려야 하는 게 도리이며 딸을 잘 보내겠다, 우리 딸을 예뻐해 달라는 부모의 모습을 만들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더없이 즐거웠던 상견례 자리였지만 자꾸만 드는 착잡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우리 부모님만의 모습이 아닌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모의 마음이라는 건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을 것이기에 평소 그랬듯 일방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싶진 않았다. 아 이젠 정말 진지하게 말할 때구나. 물론 평생을 말해 온 이야기이지만 이제 정말로 결혼을 앞두고 있고 이 부분에 대해 다시 한번 짚고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느꼈다.


부모님께 나는 평등한 결혼을 하고 싶다고 차분히 말씀드렸다. 애인과는 평등한 결혼이 가능하기 때문에 결혼을 결심한 것이며, 나의 평등한 결혼을 위해 부모님도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결혼은 우리의 결혼이며 우리가 직접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가족의 모습과 문화에 따를 것이며 그것의 시작은 다름 아닌 평등한 결혼이라고. 역시 언어는 중요하다. 천날만날 전화로 아 왜! 딸 가진 집이 왝! 나는 그대로야!로 외치는 것보다 평등한 결혼이라는 단어가 주는 힘이 훨씬 쎘다. 엄마는 한동안 평등한 결혼.. 을 되뇌었다.


평등한 결혼은 정말로 온 가족의 노력과 지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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