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lvermouse Mar 23. 2023

워킹맘의 피겨맘 데뷔전

제가 두 아이를 키우면서 다시 일을 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일 년 반이 되어가고 있어요. 기저귀도 안 뗀(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못 뗀) 두 돌 아기와 초 1 갓 입학한 두 아이를 데리고 제가 어떻게 그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두 번 다시 하라면, 그 과정을 알고는 못할 것 같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시간을 버텨내고 이제는 여러모로 많이 편안해졌습니다. 그 사이 아이들도 잘 커줬고, 업무도 손에 익었고, 또 남의 회사 온 듯 어색했던 회사 분위기에도 많이 익숙해졌거든요. 두 아이를 키우면서 일을 하는 워킹맘의 삶은, 한 번에 하나씩 일을 한다는 건 사치이고, 가끔은 초인적 힘을 발휘해야 되고, 또 엄마는 아파서도 안 되는 것이죠. 그래도 하루하루 허덕이며 바쁘지만 나와서 할 일이 있고, 집이 아닌 시카고 어딘가에 나만의 책상과 공간이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다시 스스로 예전처럼 돈을 벌 수 있다는 건 큰 기쁨이고 감사함입니다.


물론 다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에요. 그중 가장 아쉽고 속상한건, 아이들이 학교에 늦은 저녁까지 남아있어야 된다는 사실이죠. 저희 집은 남편이 거의 일 년 내내 주중 출장을 다니기 때문에 주말 부부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아이들 학교를 데려다주거나 데리고 오는 것 모두 제 몫입니다. 첫째 학교는 오후 3시 45분 정도에 끝나고 보통 아이들은 엄마나 아빠가 그 시간에 데리러 와서 놀이터 가서 놀거나 운동, 악기 등 액티비티 활동을 하러 갑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일 년 내내 저녁 6시까지 학교 애프터스쿨을 해야 돼요. 여름이면 좀 낫지만, 겨울이 일년 중 절반인 시카고에선 아이들이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학교 문을 나설 수 있죠. 5시 퇴근을 해서 쏜살같이 두 아이들을 차례로 픽업을 하더라도 학교가 문 닫기 직전에 겨우 아이들을 데리고 오게 됩니다. 물론 이젠 저도 요령이 생겨서 학교 선생님들이 하시는 유료 북클럽이나 튜터링, 혹은 과학 실험반, 체스반 같은 활동들을 미리 알아서 신청하죠.고맙게도 아이는 (아직까지는) 애프터 스쿨을 너무 좋아하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데리러 가는 날이면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 더 놀아야 되는데, 아쉬워하는데, 그래도 그런 모습마저도 엄마 눈엔 짠하기만 합니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학교 가기 전 이른 아침이나, 학교가 끝난 직후, 그리고 주말에 아이가 좋아하는 액티비티 수업을 시켜주는 겁니다. 이럴 때 초인적 에너지가 필요해요. 첫째가 좋아하는 운동은 피겨 스케이트인데, 매주 화요일 아침 7시 30분이면 스케이트장에 데려가 개인 레슨 수업을 가거든요. 혼자 새벽에 깨서 아이 도시락 만들고, 아침 준비하고, 아이들 깨워 옷 입히고 아침 먹는 동안 전 회사갈 준비를 합니다. 아이 둘을 차에 태워서 스케이트 수업을 갔다가 다시 차례로 각자 학교에 등교를 시키고 부랴부랴 회사에 출근하면, 정말 그 날 하루 써야될 에너지를 아침 9시 전에 다 쓴 기분이 들어요.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야지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것 같아서 내 몸은 녹초가 되더라도 제 기분은 좋아집니다.


아침 7시 30분에 레슨 가는 날에는 동생도 잠도 제대로 못깬 채로 업혀서 링크장에 갑니다. 아침 도시락을 먹으면서 잠을 깨죠.


그리고 지난 주말, 첫째가 그동안 연습했던 스케이트 실력을 발휘해 볼 수 있는 8살 인생 첫 피겨 경기가 있었습니다. 사실 경기 신청하기 전에 '이거 정말 해도 되는건가?' 겁이 났어요. 일주일에도 몇 번씩 레슨받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레슨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또 아직 안무도 제대로 익힐 시간이 없었거든요. 즐겁자고 시작한 일에 괜히 아이 자신감만 떨어지게 만드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고요. 그리고 시합 전날 밤, 처음으로 혼자 연습하러 데려간 스케이트장에서 정말 아이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 귀와 제 귀에 이어폰을 각각 하나씩 꼽고 공연 음악을 틀어 연습했는데, 빙판 위에 입장하는 모습부터 공연 끝나고 인사하는 연습까지 아이는 정말 진지하게, 정성껏 했습니다. 링크장이 문 닫을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 마지막까지 남아 연습을 했지요.



경기는 시카고 근교의 Evanston이란 마을에서 열렸어요. 이제 막 피겨 스케이트 시즌이 이제 막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리노이주에서 피겨 한다는 어린이들은 다 모인 것처럼 북적였죠. 아이도 평소와는 다르게 예쁜 남색 드레스도 입고, 제가 아침에 머리도 발레리나처럼 올려주었어요. 옆에 반짝이는 헤어핀으로 장식도 하고요. 경기가 시작되고, 윤서의 순서는 두 번째라 금세 차례가 되었지요. 베이식 레벨에서는 아직 음악을 전체 다 사용하지 않고 1분 정도 길이로 만들어서 출전하거든요. 링크장에 아이 이름이 불리고 문이 열리자 씩씩하게 윤서가 링크장 안으로 혼자 들어갔어요. Disney 영화 Coco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아이의 공연이 시작되었죠. 그 큰 빙상장 위에서 떨릴 법도 한데 평소 연습한 데로 하나씩 하나씩 해나갔죠. 도대체 그 1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요. 아이 모습 하나라도 놓칠세라 영상 찍으며, 또 아이에게 엄마 응원 소리가 들릴 수 있게 크게 손뼉 치고 응원하면서 그렇게 1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어요.



같은 레벨의 모든 선수들 공연이 끝나고, 먼저 밖에 나가신 코치 선생님께서 결과가 나왔다고 연락을 보내주셨습니다. 나가서 확인해 보니 2등! 비록 4명 선수 중에서 정한 순위였지만, 그래도 바쁜 엄마 아빠 때문에 턱없이 부족했던 연습 시간에도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서 받아온 상이라 더 기특하고 뿌듯했습니다. 아이는 신이 났는지, 'Competition이 스케이트 타는데서 제일 재밌는 부분이야!'면서 다음번에도 또 경기에 나가고 싶다고 했죠. 열심히 언니를 응원한 동생에게도, 아이의 대견한 모습을 발견한 엄마, 아빠에게도, 지난 주 아이의 첫 피겨 경기는 가족 모두에게 재밌고 유쾌한 경험이었습니다.




누구 말대로, 아이를 선수시킬 생각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지만, 그래도 아이가 이번에 받아온 빨간 메달은 항상 미안한 마음이 컸던 제게 조금 위안이 되어주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바쁘고, 다른 엄마들처럼 세세하게, 충분히 시간을 써주지 못하더라도, 걱정하고 염려했던 것보다 아이는 자기 자리에서 씩씩하게 잘 자라나주고 있다고, 조금 걱정을 덜어두어도 된다고 마음을 위안해주는 상 같았지요. 앞으로 이 길이 어떻게 이어질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저희는 지금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즐겁게, 무럭무럭 커나가기로 했습니다.


피겨맘으로 데뷔하던 그 날 아침, 전 동시에 둘째 덕분에 발레맘 데뷔도 하게 되었답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8살 윤서의 해리포터 생일 파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