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간의 주부 생활 후,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부터 하나 아쉬운 것이 생겼습니다. 그건 바로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없다는 거였죠. 미국에 와서 아이 하나를 키우면서 꽤 자유롭게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두 나라에서 일 년의 반반을 사는 느낌으로 지내기도 하고, 또 언제든 멀리 여행 갈 일이 생기면 가볍게 떠나곤 했습니다. 아이도 초등학교 가기 전으로 데이케어는 얼마든지 쉬었다 다시 보낼 수 있었고, 저 또한 책임져야 될, 매일 가야 될 곳이 없었으니까요.
회사에서 1년에 주어진 휴가는 단 15일, 여기에 며칠간의 병가를 더 사용할 수는 있지만, 아이들이 학교를 안 가는 날(두 아이의 학교가 달라서 학교 문 닫는 날도 다릅니다), 아이들이 아파서 학교 못 가는 날, 하루이틀 짧은 가족 여행 등에 내 휴가를 잘 배분하다 보면, 온전히 나만을 위해서 쓸 수 있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죠. 몸이 아파도 코로나 걸린 것 아닌 다음에야 아픈 몸을 끌고 회사를 나가는 날들도 있었습니다. 일 년 내내 주중엔 대부분 출장을 가버리는 남편은 제 부재 시 백업이 되어주지 못하니, 제가 아이들을 꼭 보살펴야 되는 날들은 꼭 사수해야 되니까요. 언제까지 이 일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Take it or leave it. 그렇게 버텨가며 지내기를 1년 반, 조금씩 저도 지쳐가기 시작했어요.
길고 긴 시카고의 겨울이 아직도 끝날 생각을 안 하는 3월, 어느 날 남편이 너무 지쳐있는 저를 보면서 어디든 혼자 여행하고 오라고 말을 꺼냈습니다. 과연 가도 될까, 작년부터 차곡차곡 다 안 쓰고 모아둔 휴가를 한국 갈 때 붙여서 쓰는 게 좋지 않을까, 고민고민하다가 그냥 떠나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마침 주말 근무를 해서 받은 보상 휴가 이틀도 있고 해서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보기로 했죠. 목적지는 파리, 그리고 동행자는 내 최고의 여행 메이트 엄마와 함께요.
그렇게 여행 계획을 짠지 한 달이 지나고 4월 중순이 되어 떠난 파리. 시카고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는 아침에 도착하고, 엄마가 타고 오시는 서울 출발 비행기는 저녁 도착이라 공항에 내려 저 먼저 파리 시내로 들어갔어요. 평소라면 아이들 유모차에, 짐에, 자고 있는 아이들 깨워서 움직이느라 진이 빠졌을 텐데, 저 혼자 가방 하나 가볍게 들고 공항에 내렸죠. 제일 먼저 보이는 빵집에 들어가서 바게트 샌드위치를 하나 손에 드니 '아, 예전엔 내 삶이 이랬었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예전부터 혼자서 전 세계 어디든 여행 다니는 걸 참 좋아했거든요.
아이가 3살 때 함께 온 것이 마지막이니, 거의 5년 만에 다시 돌아온 파리. 4월 중순의 파리는 따뜻할 줄 알았는데, 시카고만큼이나 꽤 쌀쌀했어요. 호텔 체크인을 하고 창문을 활짝 여니 비가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죠. 비가 오면 어떤가요. 이 소중한 나만의 시간에, 침대에서 잠깐 뒹굴뒹굴 거리면서 시차 적응도 하고, 우산 하나 들고 지리도 익힐 겸 산책을 나갔습니다. 저 멀리 반가운, 언제나 그대로인 에펠탑도 만나고, 파리 특유의 초록색 공원 의자들도 만나고, 여러 추억이 스쳐 지나가는 루브르 앞 피라미드에게도 인사하고. 걷고, 걷다가 추워지면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어니언 수프를 한 그릇 비우고 또 걸으면서 파리와의 재회를 혼자 축하했습니다.
어둑어둑 저녁이 되어, 엄마의 카톡이 도착했어요. 파리에 잘 도착해 호텔방에 들어가 쉬고 계시겠다고요. 그제야 전 파리와의 반가운 재회를 마치고 방향을 돌려 호텔 쪽으로 다시 걸어갔습니다. 하루종일 보슬비가 내려 촉촉해진 공기, 저 멀리 안갯속에서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한 에펠탑, 그리고 앞으로 이 도시에서 지낼 나만의 자유로운 며칠의 시간을 상상하면서 그렇게 파리에서의 첫날밤을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