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lvermouse May 16. 2023

번아웃 워킹맘, 파리로 탈출하다

4년 간의 주부 생활 후,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부터 하나 아쉬운 것이 생겼습니다. 그건 바로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없다는 거였죠. 미국에 와서 아이 하나를 키우면서 꽤 자유롭게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두 나라에서 일 년의 반반을 사는 느낌으로 지내기도 하고, 또 언제든 멀리 여행 갈 일이 생기면 가볍게 떠나곤 했습니다. 아이도 초등학교 가기 전으로 데이케어는 얼마든지 쉬었다 다시 보낼 수 있었고, 저 또한 책임져야 될, 매일 가야 될 곳이 없었으니까요. 


회사에서 1년에 주어진 휴가는 단 15일, 여기에 며칠간의 병가를 더 사용할 수는 있지만, 아이들이 학교를 안 가는 날(두 아이의 학교가 달라서 학교 문 닫는 날도 다릅니다), 아이들이 아파서 학교 못 가는 날, 하루이틀 짧은 가족 여행 등에 내 휴가를 잘 배분하다 보면, 온전히 나만을 위해서 쓸 수 있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죠. 몸이 아파도 코로나 걸린 것 아닌 다음에야 아픈 몸을 끌고 회사를 나가는 날들도 있었습니다. 일 년 내내 주중엔 대부분 출장을 가버리는 남편은 제 부재 시 백업이 되어주지 못하니, 제가 아이들을 꼭 보살펴야 되는 날들은 꼭 사수해야 되니까요. 언제까지 이 일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Take it or leave it. 그렇게 버텨가며 지내기를 1년 반, 조금씩 저도 지쳐가기 시작했어요. 


길고 긴 시카고의 겨울이 아직도 끝날 생각을 안 하는 3월, 어느 날 남편이 너무 지쳐있는 저를 보면서 어디든 혼자 여행하고 오라고 말을 꺼냈습니다. 과연 가도 될까, 작년부터 차곡차곡 다 안 쓰고 모아둔 휴가를 한국 갈 때 붙여서 쓰는 게 좋지 않을까, 고민고민하다가 그냥 떠나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마침 주말 근무를 해서 받은 보상 휴가 이틀도 있고 해서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보기로 했죠. 목적지는 파리, 그리고 동행자는 내 최고의 여행 메이트 엄마와 함께요. 


그렇게 여행 계획을 짠지 한 달이 지나고 4월 중순이 되어 떠난 파리. 시카고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는 아침에 도착하고, 엄마가 타고 오시는 서울 출발 비행기는 저녁 도착이라 공항에 내려 저 먼저 파리 시내로 들어갔어요. 평소라면 아이들 유모차에, 짐에, 자고 있는 아이들 깨워서 움직이느라 진이 빠졌을 텐데, 저 혼자 가방 하나 가볍게 들고 공항에 내렸죠. 제일 먼저 보이는 빵집에 들어가서 바게트 샌드위치를 하나 손에 드니 '아, 예전엔 내 삶이 이랬었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예전부터 혼자서 전 세계 어디든 여행 다니는 걸 참 좋아했거든요. 



아이가 3살 때 함께 온 것이 마지막이니, 거의 5년 만에 다시 돌아온 파리. 4월 중순의 파리는 따뜻할 줄 알았는데, 시카고만큼이나 꽤 쌀쌀했어요. 호텔 체크인을 하고 창문을 활짝 여니 비가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죠. 비가 오면 어떤가요. 이 소중한 나만의 시간에, 침대에서 잠깐 뒹굴뒹굴 거리면서 시차 적응도 하고, 우산 하나 들고 지리도 익힐 겸 산책을 나갔습니다. 저 멀리 반가운, 언제나 그대로인 에펠탑도 만나고, 파리 특유의 초록색 공원 의자들도 만나고, 여러 추억이 스쳐 지나가는 루브르 앞 피라미드에게도 인사하고. 걷고, 걷다가 추워지면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어니언 수프를 한 그릇 비우고 또 걸으면서 파리와의 재회를 혼자 축하했습니다. 


5년 전에 유모차를 끌고 왔던 이 곳에 다시 나홀로


어둑어둑 저녁이 되어, 엄마의 카톡이 도착했어요. 파리에 잘 도착해 호텔방에 들어가 쉬고 계시겠다고요. 그제야 전 파리와의 반가운 재회를 마치고 방향을 돌려 호텔 쪽으로 다시 걸어갔습니다. 하루종일 보슬비가 내려 촉촉해진 공기, 저 멀리 안갯속에서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한 에펠탑, 그리고 앞으로 이 도시에서 지낼 나만의 자유로운 며칠의 시간을 상상하면서 그렇게 파리에서의 첫날밤을 보냈습니다. 


창문을 열면 방돔 광장을 볼 수 있었던, 마음에 쏙 들었던 호텔방













매거진의 이전글 마흔에 다시 시작한 내 두 번째 직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