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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mouse Jan 04. 2024

12월 '텅 빈 달력'의 기쁨

일 년 중 12월 말은 우리 가족이 '잠시 멈춤'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1년 내내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어떤 주는 일요일 밤부터 금요일까지 쉬는 주 없이 이어지는 남편의 출장도 점점 속도를 늦춰 잠시 멈추는 시기이다. 또 나도 주중 남편의 공백을 메꾸며 어린 두 아이들을 키우고, 워킹맘으로 살아가며 한 순간도 놓을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을 잠시 내려놓고, 그동안 육아 공백 비상상황을 대비해서 아끼고 아껴두었던 남은 연차들을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시기이다. 온전히 우리 네 식구가 붙어 지낼 수 있는 2주 정도의 시간이다.


12월 초에는 여러 연말 모임들, 크리스마스 파티, 아이들의 학교 콘서트로 정신없이 바쁘게 매일매일이 지나간다. 가족들이 TPO에 맞게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쇼핑하고 준비하고 챙겨주고 다 내 몫이다. 올해부터 학교 합창단에 들어간 첫째는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콘서트가 연달아 있어 매일매일 바꿔 입을 빨간 의상을 찾아야 되는데 그게 큰 숙제였다. 그래도 이렇게 12월이 주는 이 축제 같은 시간을 하루하루 보내다 보면 '벌써 한 해가 끝났어? 말도 안 돼!' 하는 마음이 조금은 사라진다. 미국 생활 속에서 12월 말일이 다가오면 '그래, 12월을 떠나보내는 의식은 이 정도로 충분해. 이제 새로운 1월을 맞이할 수 있겠어'란 생각이 든다. 그 정도로 여기 사람들은 12월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11월부터는 다음 달 12월 달력에 누구 만나는 일정이 뭐라도 꽉 차있어야지 잘 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연말 인스타그램을 보면 시카고 인간관계 지도가 대충 그려진다. '아, 누구랑 누구랑 친하고, 여기는 가족끼리도 친하군. 의외의 조합이네?' 말로 내뱉지는 않지만 속으로 하는 나만의 생각들. 나 불러주고 모이자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분이 좋고 고맙고, 반대로 그런 가족이나 친구가 없으면 또 급 외로움을 탄다.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런데 문제는 이거다. 한국에서는 친한 가족들끼리 만나도 밖에서 맛있는 거 사 먹으며 한 끼 함께 하고 오면 되지만, 여기는 주로 누군가의 집에 모여서 음식을 나눈다. 우리 집이 항상 깨끗하고 내가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부담이 적을 텐데, 내 생활 정비할 시간도, 에너지도 모자란 일상에서 집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건 상상 이상의 스트레스다. 남에게 하나 받으면 둘로 갚아야 마음이 편해지는 나는 매년 연말이면 그렇게 올해 내가 갚아야 되는 리스트를 작성하며 연말 모임 달력을 채워나갔고 그만큼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할 줄 아는 손님 초대 요리도 몇 없었기 때문에 토요일, 일요일 연이어 모임이 있는 날은 같은 스테이크 요리를 꾸역꾸역 연달아 먹기도 했다. 숙제처럼 연말을 보냈다고 할까. 그렇다고 타지 생활의 근본적 외로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올해는 과감하게 12월 3주부터 달력의 모든 일정을 비워뒀다. 11월에 미리 잡아두었던 몇 개 약속은 양해를 구하고 1월 이후로 날짜를 변경헀다. 사실 내게 이건 큰 용기였다. 보통의 나였다면 웬만하면 남과 약속을 한 건 내가 먼저 바꾸지 않는 편이다. 싫은 소리 한 번 하는 게 힘들고 어려워서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꾹 참고 하는 편이다. 그런데 올해 연말에는 식구들끼리 길게 여행을 가고 싶다는 남편의 희망사항에 중간중간 달력에 써 놓은 약속들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서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정말 미안한데, 우리가 이때 가족 여행을 가게 될 것 같아. 1월로 날짜를 바꿔도 될까?' 의외로 사람들은 너무 쉽고 편안하게 대답을 해줬다. '당연히 그래도 되지!' 그렇게 12월 마지막 2주는 온전히 우리 넷이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고, 한겨울 따뜻한 플로리다에서 크리스마스를, 시카고보다 두 배는 더 추운 캐나다 밴프에서 새해 스키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의 이 12월 중순부터의 '텅 빈 캘린더' 전통은 앞으로도 계속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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