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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mouse Jan 04. 2024

시카고 겨울에서 탈출하다

플로리다 세인트 어거스틴(St. Augustine)

자, 길고 길었던 나의 12월 연말 여행을 시간 연대기 순으로 한 번 기록해보고자 한다. 올해 내 다짐 중 하나는 뭐든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이다. 사람 관계에 있어서도, 회사 생활에 있어서도, 내 감정 표현, 거절하는 것, 그리고 내 블로그에 기록하고 싶은 순간을 글로 남기는 것도.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쉽게 쉽게 가볍게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벌써 이렇게 하루에도 두 번째 글을 쓰게 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첫 번째 겨울 여행. 사실 이 계획을 짤 때만 하더라도 우리 여행 계획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시카고는 겨울이 길고 춥기 때문에 크게 고민하지 않고 우린 따뜻한 곳, 플로리다 올랜도로 가기로 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디즈니월드도 있고, 또 특히 이제 슬슬 디즈니를 졸업할 낌새를 보이는 첫째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즐거운 마음으로 디즈니를 가겠나 생각하니 어렵지 않게 정할 수 있었다. 총 5박 6일의 여행 중, 이틀은 디즈니월드를 가고 중간중간 플로리다에서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즐겨보기로 했다.



올랜도로 떠나는 날 새벽, 시카고는 아마도 올 겨울 역대급으로 추웠던 것 같다. 네 식구 겨울 코트만으로도 한 짐이라 차에 다 두고 가볍게 입고 갔더니 막내가 발이 시리다고 울 정도로 추워서 얼른 따뜻한 올랜도로 탈출하고 싶었다. 시카고에 살아서 좋은 점은, 미국 어디를 가든 4~5시간 이내로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올랜도는 2시간 3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드디어 도착한 플로리다 올랜도 공항에 내려 밖으로 나가니 상상했던 만큼의 여름 날씨는 아니었지만, 선선한 가을, 초겨울 날씨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플로리다의 12월 안에는 4계절이 다 있었고, 아마도 우리가 도착했던 첫날은 아마도 그중 가을 날씨였던 것 같다.


차를 픽업한 후 우리는 호텔이 있는 올랜도 다운타운으로 가지 않고 St. Augustine에 가보기로 했다. 동쪽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2시간 정도 달리다 보면 나오는 미국의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사실 이건 내 아이디어는 아니고 항상 뭐든 무리해서 스케줄 짜기를 좋아해서 여행 시작부터 내 입을 튀어나오게 만드는 남편의 아이디어이다. 조수석에 앉아 가면서 St. Augustine 역사에 대해서 좀 찾아봤다. 1565년 스페인군대 가 이곳 플로리다 St. Augutstine에 정착을 하고 총독 임명을 하게 되면서 미국 최초의 유럽인 정착 도시가 되었다. 이름에서 상상해 볼 수 있다시피, 스페인 군대가 이곳에 오게 된 시기가 8월 중순인 성 아우구스티누스 축일 근처라 자연스럽게 도시 이름도 St. Augustine이 되었다고 한다.




이 작은 도시 입구로 들어가면 다른 미국 도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다른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맥도널드, 스타벅스 대신 작은 로컬 샵, 카페, 레스토랑들이 있다. 마치 유럽의 소도시에 들어간 기분이 든다. 도심 광장 근처에 차를 세우고 내리는데 마침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있어서인지 작은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캐럴 종소리가 울렸다. 잠깐하고 멈출 줄 알았는데 노래는 한 곡을 다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종소리를 들으며 난 10년 전 즈음 포르투갈 출장의 그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 날처럼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시기였다. 비수기를 맞아 거리는 한산했고, 길가의 나무들은 분명 야자수인데, 날씨는 가을이고,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진 마을은 분명 한겨울이었다. 기억 속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그때 계절의 믹스매치가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또렷이 떠올랐다. St. Augustine은 정말로 내가 10년 전 그곳에 간 것처럼 포르투갈의 그 작은 마을과 꼭 닮아있었다.




그때부터 한참을 튀어나와 있었던 내 입이 드디어 들어갔던 것 같다. 인공적인 도시 올랜도에서 두 시간만 운전해서 올라와보면 이렇게 멋진 오래된 마을이 있었다니. 몇 시간을 비행기, 차에 갇혀서 힘들어했던 아이들도 이 마을의 작은 골목골목을 산책하면서 신나게 구경을 했다. 그 자리에서 갓 튀긴 따끈따끈 도넛 위에 주문한 토핑을 바로 만들어서 주는 도넛 가게에서 간식도 먹고, 빨간 간판이 예쁜 크레페리에 들어가 누뗄라 크레페도 주문했다. 비록 크레페 맛은 상상했던 것보다 조금 별로였지만, 덕분에 가게 안 쪽에 있는 작고 아름다운 정원 안으로 들어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금방 어둑어둑해지고, 마을 이곳저곳에 크리스마스 조명이 켜졌다. 강변을 따라 낮게 지어진 하얀 건물들에는 마치 홀마크 크리스마스 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화려한 조명 장식이 되어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St. Augustine은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크리스마스 마을'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럴만했다. 이 외에도 요새, 박물관, 성당 등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볼거리가 많았다. 우린 더 어두워지기 전에 부지런히 올랜도로 2시간 다시 돌아가야 되기 때문에 아쉽게도 다 둘러보지 못하고 서둘러 나왔다. 올랜도가 주는 인공미에서 잠깐 탈출하고 싶을 때, 이곳 St. Augustine를 추천하고 싶다.



우리 연말 여행의 첫날, 드디어 숨 막힐 듯이 빽빽하게 돌아가던 일상에서 한 발자국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이제 2023년 남은 시간을 여유 있는 이 속도로 보내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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