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었던 터널의 끝에는
1월 3일, 정말 오랜만에 새해 첫 출근을 했다. 사실 12월 크리스마스 올랜도 여행을 다녀온 뒤 이틀 정도 출근을 하긴 했지만, 회사 오피스도 텅 비었고, 내 마음의 절반은 이미 연말 붕 뜬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캐나다 밴프로 스키 여행까지 알차게 연말 여행을 다녀온 다음 날, 오랫동안 비운 집은 엉망이었지만, 그냥 난 바로 출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한 번 안 가기 시작하니 몸이 이 생활에 적응을 해서 쭉 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는 아침 일찍 아이들 먹을 걸 챙기고 막내 유치원 등원 준비를 해서 출근을 하면서 아이를 데이케어에 맡겼다. 이번 주까지 겨울 방학인 첫째는 맡길 곳이 없어 남편이 재택을 하면서 함께 있기로 했다. 남편 또한 바로 업무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첫째는 혼자서 하루종일 문제집도 풀다가, 컴퓨터도 하다가, 팔찌 만들기도 하고 그렇게 소일거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오랜만에 유치원에 간 막내는 신나게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유치원 알림 노트에 올라오는 까르르 웃고 있는 아이의 사진이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마치 로키 산맥에서 스키를 타고 내려오던 지난 며칠이 마치 전생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시카고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회사 사무실에 앉아 그동안 한국에서 온 밀린 이메일들과 공문들을 체크했다.
퇴근길, 유치원에 들러 둘째를 픽업하고 집에 들어갔다. 이 날은 오랜만에 첫째의 바이올린 수업이 있는 날이다. 남편에게 문자를 보내 아이가 바이올린 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알려주라고 했다. 집에 도착하니 웬일로 아이는 혼자서 머리까지 싹 감고 새 옷으로 입고 바이올린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날 하루종일 집에서 답답하고 심심했던 아이에게 유일한 스케줄이라 그랬던 것 같다.
첫째는 학교를 언제 다시 가냐고 물었다. 이틀 더 집에서 이렇게 보내고, 주말을 보낸 뒤에 개학을 한다고 알려줬더니 한숨을 크게 내쉰다. 너무 심심하고 빨리 학교 가서 친구들이랑 만나서 놀고 싶단다. 어제 일하는 아빠 옆에서 많이 심심했는지 노트에 일기를 써둔 걸 보니 내용은 이렇다.
아빠는 내 옆에서 하루종일 끝나지 않는 미팅을 하고 있고, 엄마는 아침 일찍 회사 출근을 했고, 내 동생 소피아는 엄마 손 잡고 유치원에 갔다. 그런데 난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있다. 나는 갈 곳이 없다. 학교에 빨리 갔으면 좋겠다.
아빠한테 혼날까 봐 TV는 못 틀고, 지난 몇 주 동안 둘이 지지고 볶았던 동생마저도 유치원에 가버리니 덜렁 혼자 남은 첫째의 마음이 그대로 읽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생각해 봤다. 그래, 나도 만약에 직장이 없었더라면 이 아이와 같은 마음이었겠지. 다들 긴 연말 휴가 후 학교로, 직장으로, 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는 곳으로. 다시 식구들이 각자 제 자리로 떠나고 텅 빈 집은 조용한 평화는 찾아왔겠지만, 아마도 내 마음의 평화를 주지는 못했을 것 같다.
미국에 온 이후, 난 꽤 긴 시간 우울증을 앓았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였고, 아직은 다 꺼내지 못하는 상처들이지만, 그 이유 중 하나는 매일 아침 내가 갈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10년 넘게 한국에서 누구보다도 활발하게 회사 생활을 하며 내 자리를 만들어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연고도 없는 시카고에 왔다. 경제적 여유도, 일할 수 있는 비자도, 내 이름 석 자도 사라져 버린 이곳에서 유치원 안 가는 한 살 반 아기와 하루종일 있으며, 난 마치 집이 창살 없는 감옥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빨리 밤이 이대로 와버렸으면 좋겠다 싶었다. 암막 커튼을 쳐두고 잠자기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 아침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낮잠을 두 번이나 재우고, 나도 눈을 감았다. 게다가 내 삶에서 일어나지 말았어야할 일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어두운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그 시절, 그 집 사진을 보면 가슴 한 구석이 아리다.
그렇게 길고 긴 터널을 버티고 지내면서 내가 찾은 탈출구는 바로 미국에서의 취업이다. 돈을 얼마를 벌건 상관없었다. 그야말로 둘째 유치원비 정도만 벌어도 좋겠다 싶었다. 일단 내가 무조건 아침에 로션이라도 찍어 바르고 나갈 곳이 필요했다. 취업 과정은 정말 쉽지 않았다. 출장 많은 남편 대신 혼자 아이 둘을 돌봐야 되는 상황이라, 무조건 업무 시간이 안정적인 곳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찾은 지금의 한국 회사.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이 회사는 유독 나에게만 남다른 잣대로 취업의 문을 높였다. 그런 회사가 참 치사하고 미웠지만, 그래도 내가 나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마흔 넘어 다시 막내 생활인 인턴을 한다고 난생 처음 자존심도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도 하고 정말 힘든 시간도 보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정말 나 스스로 잘 참았다고 칭찬해주고 싶을 만큼 잘 버텼다. 그렇게 결국 시카고 어딘가에 내가 매일 아침 앉을 수 있을 수 있는 작은 책상 하나를 갖게 되었다.
내가 미국에 와서 살게 돼서 그런 것일까. 유독 요즘 해외 생활을 시작하게 된 젊은 엄마들의 글이나 유튜브를 많이 보게 된다. 오게 된 사연들도 거의 비슷비슷하다. 사실 요즘 시대의 미국 이민은 예전 우리 고모, 이모 시절과는 조금 다르다. 한국에서 회사 생활 잘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의 유학으로, 해외 취업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두고온 게 예전 그 시절보다는 조금 더 많기에 아쉬움도 더 크다.
씩씩하게 새로운 환경을 개척하며 잘 살아가는 이들도 분명히 있지만, 내가 그랬듯이, 꽤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우울증에 걸리고, 끝이 안 보이는 긴 터널을 지나는 중이었다. 내가 그 시간을 겪어봤기에, 긴 터널을 빠져나와봤기에 얼마나 힘들고 혼자 힘으로 빠져나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인지 너무나도 잘 안다. 같은 해외 육아 생활이라고 하더라도 현지인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Expat 라이프를 즐길 수 있는 동남아 국가에서의 생활과 이곳 미국의 현실은 너무나도 다르다. 남들은 다 좋다는 미국에서 너 혼자 왜 그러냐는 말은, 정말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사실 언제까지 내가 이 회사를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 회사를 다녀서 좋은 점도 많지만, 엄마, 아빠가 있는 한국에 마음대로 못 나간다는 건 큰 제약이다. 그래도 분명한 건 난 내가 다음번에 무슨 일을 할지 정한 다음에, 이 회사를 나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모두가 나가버린 텅 빈 집에서 하루종일 혼자 시간을 보낼 자신이, 난 없다.
고민을 하다가 심리 상담 공부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을 했다. 긴 터널을 지나며 내가 가장 절실하게 도움을 받은 분야이기도 하고, 미래에 나와 비슷한 힘든 시간을 겪게 될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또 앞으로 아이들을 키울 때도 심리학 공부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살면서 힘든 시간을 한 두 번 즈음은 해봤을 마흔 즈음이 되면, 누구나 쉽게 관심 갖을 수 있는 분야가 아닐까 싶어 그냥 옵션 중 하나로 열어두고 있다. 아직 뭘 정한 건 없지만, 새해에는 어느 방향으로든 한 발자국 걸어 나가보자고 다짐을 했다. 그러면 또 어디론가 그 길이 이어지겠지.
첫째는 길고 지루한 집콕 겨울 방학을 며칠 더 보낼 예정이다. 사실 마음먹으면 반나절 문 여는 동네 커뮤니티 센터에 보낼 수 있겠지만, 그냥 둘 계획이다. 집에서 혼자 심심하게 보내는 이 시간 뒤에 만나게 될 새로운 학기, 학교, 친구는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올 테니까. 아마 월요일 아침이 되면 내가 학교 가자고 깨우기도 전에 아마 준비 싹 하고 신발 신고 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