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표현주의 여성 작가 파울라 모더존베커 - 시카고 미술관 특별전
다시 부지런히 글을 써보기로 마음먹은 요즘, 오늘은 어떤 글을 쓸지 글감을 찾는 건 숙제이자 일상의 보물찾기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점점 추워지는 시카고 날씨에 몸이 움츠려드는데 '뭐라도 찾아 나서보자'라고 등 떠밀어 주기도 하죠.
바로 어제 점심시간이 그랬어요. 대부분의 워킹맘들이 그렇겠지만, 점심시간 한 시간은 24시간 중 오롯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소중한 나만의 시간이잖아요. 전 한 달에 한 번 정도 특별한 날을 아니고서는 혼자 자리에서 도시락이나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해요. 밀린 넷플릭스나 유튜브, 가끔은 책을 보는 게 제 즐거움이죠. 그런데 그걸로는 아무래도 뭔가 글감을 찾기 어려울 것 같아 어제는 최대한 빨리 점심을 먹고 나가서 미술관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지난주에 미술관을 다녀왔을 때가 아마도 올해 시카고 가을의 막바지였나 봅니다. 며칠 새 길거리 사람들의 옷도 두툼해졌고, 황홀했던 단풍들은 이제 거의 반짝임이 사라졌어요. 만져보지 않아도 바스락 소리가 들리는 듯한 잎들은 어느 날 내릴 비바람에 이제 한 해를 함께 보낸 정든 나무와 언제든 이별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요. 천천히 걸었으면 추웠을 날씨지만, 1시간 안에 점심도 먹고 미술관 산책도 다녀와야 되는 워킹맘에게, 사실 이건 미술관 산책이라기보다 '미술관 파워워킹'이 맞겠네요.
자, 미술관에 도착을 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멤버십 라운지에 들려서 커피 한잔을 마시는 겁니다. 시카고 미술관 2층에 가면 미술관 회원권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라운지가 숨어있는데요, 시카고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크루아상도 있고, 무료 커피도 있고, 또 와인과 간단한 샌드위치 같은 점심도 팔고 있지요. 미술관을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도, 저기 가서 빵과 핫쵸코를 사준다고 하면 따라나섭니다.
저의 점심시간 미술관 산책 키포인트는 딱 한 곳만 보고 오기. 사실상 미술관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15분이 채 안되기 때문에 제가 정한 룰인데, 이게 꽤 재밌어요. 지난번에는 새로 오픈한 한국관을 다녀왔으니, 이번엔 1층에서 열리는 작은 특별전을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독일의 표현주의 여성 작가 파울라 모더존베커 (Paula Modersohn-Becker, 1876–1907)의 I Am Me 전시회였죠.
사실 오며 가며 이 작가의 작품을 본 적은 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어요. 파울라 모더존베커는 엄마와 아이들, 시골 풍경, 여성의 초상화 등을 주로 그린 작가입니다. 특히 이 작가가 유명한 데는 세계 최초로 임신한 여성의 자화상으로 그린 것이죠. 그 당시만 해도 금기시되던 주제였거든요. 그 외에도 포동포동한 아기부터 지금 우리 딸들의 나이였을 어린 소녀들의 모습, 이제 갓 엄마가 된 여자와 주름 하나하나에 삶의 추억이 차곡차곡 쌓인 가난한 농부의 아내, 그 긴긴 세월 풍파를 묵묵하게 다 견딘 것만으로도 위대하기 그지없는 할머니의 모습까지... 다양한 여성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오래 바라보고 화폭에 담은 작품들이 참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리고 알게 된 충격적이고 슬픈 이야기는, 파울라는 첫 딸을 낳고 13일이 되던 날, 패혈증으로 31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죠. 여섯 번째 결혼기념일에 그린 자화상 속의 따뜻하고 행복했던 모습이었던 만삭의 파울라는 불과 몇 달 뒤 이 세상과 영원한 이별을 할 것이라고 상상도 못 한 표정이라 저는 더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서른한 살, 세상에 갓 태어난 딸을 두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먼 길을 떠나는 파울라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파울라가 오래오래 살아서 딸이 소녀가 되고, 파울라가 중년이 되고, 노년의 할머니가 되는 모습까지 따뜻한 시선으로 자기 삶을, 엄마의 삶을 화폭에 남겨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15분의 짧은 미술관 산책이었지만, 파울라의 그림은, 그리고 그녀의 생애 이야기는 제 마음속에 긴 여운으로 남았습니다. 그녀의 전시가 끝나기 전에 다시 한번 보러 가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