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는 모압 여인이자 과부였던 룻이 유대인 공동체로 받아들여지고 나아가 메시야의 족보에 기록되는 은혜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 때 룻기 2장에는 가난한 룻이 추수하는 일꾼들이 있는 밭에 가서 이삭을 줍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룻 2:1~3)
이는 원래 이스라엘의 율법에 있는 내용입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19:9~10)
그래서 당시 부유한 사람들이 추수를 할 때에는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떨어진 이삭들을 줍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룻이 이삭을 줍는 일은 일반적으로 이삭 줍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보통 곡식을 추수할 때에는 어떤 식으로 이뤄질까요?
1) 우선 일꾼들이 곡식을 베면서 나아갑니다.
2)그러면 그 뒤로 다른 일꾼들이 따라가면서 곡식을 묶어 단을 만들고요.
3) 그 다음 일꾼들이 단을 옮겨서 쌓아둡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단계에서 이삭을 주울 까요?
일반적으로는 곡식단을 만들고 난 나머지 이삭을 줍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곡식은 주인이 단으로 묶어 가져가게 되고 남은 것을 고아나 과부, 나그네가 가져가는 구조인 것이죠.
그런데 룻의 모습은 어떤가요?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룻 2:3)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룻 2:7)
룻은 곡식 단 사이를 지나다니며 이삭을 줍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이삭을 훨씬 많이 주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삭을 줍는 사람의 입장이고, 일꾼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거슬리는 행위입니다.
단을 묶는 사람은 앞서 베는 일꾼들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가며 곡식을 모아 하나의 묶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룻이 계속 걸리적거리면서 떨어진 이삭들을 가져가면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룻의 행동은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범위를 넘어선 행동이기도 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들은 밭의 네 귀퉁이에 남은 곳식들을 주워야 했습니다.
이런 룻의 모습에 대해 관대한 부자 '보아스'가 내린 명령을 한번 볼까요?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룻 2:9)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룻 2:15~16)
일단 룻은 그 과정에 일꾼들과 상당한 마찰을 빚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꾼들은 룻을 계속해서 건드리고 책망하고 꾸짖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하죠. 룻은 선을 넘는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런 룻에 대해 보아스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더 큰 자비로 룻을 선대합니다.
룻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소심하고 순종적이기만 한 여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더욱 더 적극적으로 "자비"를 구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허용된 은총을 넘어선 은총을 매우 강력하게 구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룻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에게 우리의 필요를 구할 때 보여야 하는 자세에 대해 적용을 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에게 구할 때 너무 소극적으로 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스로 위축되고 괜히 기복적이면 안될 것 같고 욕심을 가지고 구하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그러나 성경에는 이런 적극적인 간구는 굉장히 많이 보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런 적극적인 믿음, 주도적인 믿음을 권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 조차 하나님께 구할 때는 "간청하는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5~13)
그러니 여러분.
지금 기도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너무 많은 것을 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십니까?
괜찮습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룻의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그런 룻의 모습에 대해 성경은 보아스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축복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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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살펴보기 (7) - 예루살렘 입성
계속해서 마가복음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총 3일에 걸쳐 예루살렘을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다루는 예루살렘 입성과 마가복음의 묘사가 조금은 다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예루살렘 입성이 마태복음의 묘사인데요. 마가복음에서는 어떻게 묘사하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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