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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호 May 31. 2019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에 나타나는 제자도

산상수훈에 나타나는 '비범성'을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가 험난한 시기를 지나가고 있다. ‘세습’, ‘목회자의 성윤리’, ‘교회재정’ 등 늘 윤리적인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고 있다.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교회모습은 급진적인 개혁을 요청받는 동시에 한국교회의 ‘어른’들에 대한 향수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고(故) 은보 옥한흠 목사일 것이다. 그가 일평생 강조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그 뒤를 따르는 ‘제자도’는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나름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하나의 탈출구이기도 하다. 물론 예수의 제자가 되느냐, 목사의 제자가 되느냐의 논박이 여전히 존재한다. 왜냐하면 대형교회의 성장에 ‘제자훈련’의 역할이 핵심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윤리적 타락의 길에서 ‘제자도’는 화두인 키워드임이 확실하다. 이제는 대형교회를 위한 제자가 아닌 한국교회의 쇄신을 위한 제자가 요청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도’를 외쳤던 본회퍼의 산상수훈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게 된다.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값싼 은혜란 우리교회의 철천지원수다. 오늘날 우리의 투쟁은 값진 은총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투쟁이다. 값싼 은혜란 싸구려 상품과 같은 은혜요, 헐값으로 팔아 치우는 사죄요, 헐값으로 팔아 치우는 위로요, 헐값으로 팔아 치우는 성례전이다. 값싼 은혜란 교회의 창고에 무진장 쌓여있는 상품처럼 손쉽게, 주저 없이 그리고 무한정 쏟아버릴 수 있는 은혜다. 값싼 은혜란 공짜로 주는 은혜요, 대가를 치르지 않는 은혜다.” 한국교회는 값싼 은혜로 지금의 지경에 이르렀고 값진 은혜를 다시 한 번 회복해야하는 갈림길에 서있다. 이런 시대적 문제에 본회퍼는 ‘단순한 순종’을 요구한다. 본회퍼는 말씀의 요구에 대해  이성의 이해타산적인 개입을 거부하고 급진적으로 실천할 것을 요청한다. 제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의지하고 세상보다 말씀을 더 든든한 토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최종적인 가능성’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에게 단순한 순종은 일어날 수 없다.

    지금부터 우리는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에서 소개하는 ‘산상수훈’의 내용을 중심으로 본회퍼가 소개하는 제자도를 살펴볼 것이다. 본회퍼의 산상수훈을 요약하면 2가지 키워드로 정리된다. ‘비범성’과 ‘은밀성’이다. 먼저 ‘비범성’의 시작이 되는 ‘팔복’에 대한 본회퍼의 해석을 살펴볼 것이고 다음으로 팔복 이후의 말씀을 통해 ‘비범성’의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범성’의 완성이 되는 은밀성을 살펴봄으로서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제자도를 정리해볼 것이다.


2. ‘포기’를 통해 시작되는 제자의 ‘비범성’


    본회퍼는 값진 은혜를 강조하며 그리스도의 ‘부름’과 제자들의 ‘따름’을 강조한다. 특별히 산상설교를 통해서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의 ‘비범성’을 강조하며 윤리적 주체로서 살아가는 제자의 삶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특수성을 설명한다. 산상설교의 시작인 팔복은 그리스도인의 ‘비범성’의 시작을 알려준다. 본회퍼는 팔복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름자체가 ‘복’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약속이 ‘복’이라는 현재와 미래의 긴장상태를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부른 그 자리는 ‘포기’의 자리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에게 포기자체는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포기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도와의 사귐과 약속이 있기에 그 자리는 복이 된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본회퍼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나, 영적인 해석을 거부한다. 다만 그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원형인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로 해석을 한다. 그리고 제자들은 실제로 모든 면에서 가난했다. 예수의 부름에 순종하는 순간 그들의 재산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향과 공동체, 심지어 그들을 부유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잃어버렸다. 제자들은 예수 때문에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은 돌입하는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 동시에 가난 속에서 이미 하늘나라를 경험한다. 제자는 하나님을 다스림을 의지하지 않으면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본회퍼에 따르면 “애통하는 자들이란 참으로 이 세상이 ‘행복과 평화’라고 부르는 것을 포기하기를 각오한 자들이요. 세상과 장단을 맞출 수 없고 세상과 짝할 수 없는 자들이다.”제자들이 세상의 행복과 평화를 포기하는 것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과 맞물려있다. 제자들은 세상의 행복에서 기쁨을 찾지 않는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나눔으로서 그분의 능력 안에서 위로를 얻는다.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제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모두 하나님께 맡긴다. 온유란 동물이 길들여질 때 사용되는 단어, 하인이나 종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었다. 하나님께 길들여진 제자들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한다. 제자들이 의지하는 하나님은 “땅을 창조하셨고, 이 땅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셨다. 제자들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박해를 당하는 가운데서도 교회와 공동체와 보물과 자매들과 형제들을 가지고 있다.”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제자들은 자신들의 ‘의’도 포기한다. 제자들의 행동과 희생은 세상의 ‘의’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기에 그들은 세상의 칭송과 명예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미래의 의를 바라본다. 미래적인 ‘의’는 제자들이 스스로 세울 수 없는 종말론적 ‘의’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항상 굶주리고 목이 마르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종말론적 ‘의’를 추구하기에 장차 참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제자들은 자신의 ‘존엄성’을 포기한다. 그들은 자신의 고난과 결핍에서 나아가 타자의 죄책과 고난에 참여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비롭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실로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다. 비록 죄인들과의 사귐으로 수치가 돌아올지라도 제자들은 복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비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타인을 헤아린 마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제자들은 자신의 기준을 포기하는 자이다. 세상의 기준을 회개하고 오직 예수로 기준을 삼는 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바라본다.


마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의 제자들은 ‘폭력과 폭동’을 포기한다. 본회퍼에 따르면 “그들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기보다, 스스로 고난을 받음으로써 평화를 유지한다. 제자는 다른 사람들이 깨뜨리는 공동체를 보호하고, 자기주장을 포기하며, 증오와 불의에는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이렇게 그들은 선으로 악을 이긴다.”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예수의 제자들은 재산과 행복과 권리와 정의와 명예와 폭력을 포기하면서 판단과 행위에서 세상과 구별된다. 결과적으로 팔복의 사람은 포기와 박해를 마주한 사람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박해하고 거부하지만 제자들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여 ‘복된 삶’을 살아간다.


3. ‘더 나은 의’를 실현하는 제자의 ‘비범성’


마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제자는 위만을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의해 세상에서 감당해야할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나아가야 한다. 소금이라는 실존은 본회퍼에 따르면 ‘축복선언을 들은 제자들의 실존’이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낸다. 교회는 세상을 보존하는 힘을 가지게 되며 세상에 은밀하게 영향력을 끼친다. 그러나 소금이 변질되어 맛을 잃으면 세상을 보존하지도, 영향력을 끼치지도 못한다.

    본회퍼에 따르면 “제자들의 공동체에게 예수의 부름은 단지 소금의 은밀한 작용만이 아니라 빛의 명백한 활동도 요구한다.” “나는 빛이다.”라고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도 ‘빛’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의 생활은 그들의 선택에 상관없이 세상에 그들의 선한 행위가 드러나야 한다. 제자들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실이 드러나야 한다. 빛으로 드러나는 선한행실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포기(팔복의 포기)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이 찬양받으신다.


마5:17-20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는 소금과 빛이라는 새로운 실존을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율법을 가르친다. 이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요구한 새로운 ‘율법’이 아니다. 구약의 율법과 예수의 산상설교는 동일한 율법이다. 다만 다른 것은 제자들의 율법에는 ‘더 나은 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이다. 제자들의 율법실천이 ‘더 나은 의’를 드러내는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불렀기 때문이요,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적으로 매여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통해 성취하시기 때문이다.

    본회퍼에 따르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율법을 성취한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만이 하나님과 완전한 사귐을 나누기 때문이다. 예수는 친히 제자들과 율법 사이에 들어온다. 그러나 율법은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들어오지 못한다. 율법으로 나아가는 제자들의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한다. 따라서 예수는 오직 자신만이 성취하는 율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제자들을 자기 자신과 새롭게 결속한다.” 제자는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와의 사귐과 결속에서 제자들은 율법의 실천으로 ‘더 나은 의’라는 결과적인 열매를 경험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나은 의’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사항들이 뒤로 열거된다. ‘형제 사랑’, ‘아내 사랑’에 대한 ‘진실성’을 강조한다. 제자는 그리스도 앞에서 숨김없이 진실하게 계명을 준행해야한다. 본회퍼에 따르면 “‘진실성’은 제자직의 ‘전체성’을 달리표현 하는 말이다.” 진실성은 오직 그리스도에 매어있는 자들만이 진실한 회개를 경험함으로서 추구할 수 있는 가치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에게 진실한 모습으로 나아오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만이 진실한 사귐으로 그리스도의 부름에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본회퍼는 ‘형제사랑’, ‘아내사랑’에 이어 ‘원수사랑’을 설명한다.

    원수사랑은 “산상설교 가운데서 앞에서 언급된 모든 내용을 요약하는 말씀”이다. 제자들에게 원수란 제자들의 신앙을 파괴하고 율법을 범하는 자라고 비난하는 ‘구체적인 존재’였다. 제자에게 원수는 권력과 명예로 무장하고 제자들을 멸시 조롱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을 정치적인 형태의 이스라엘 민족과 분리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은 원수에 대한 정죄와 결별, 전쟁과 승리를 말하지만 예수는 원수에 대한 승리의 율법을 ‘원수사랑’의 법으로 바꾸어 놓았다. 본회퍼에 따르면 “원수사랑은 자연적 인간에게 감당할 수 없는 거침돌이 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다. 그리고 원수사랑은 선과 악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충돌한다.” 하지만 제자들은 원수의 비난과 모욕에도 더욱더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원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더욱 깊이 깨닫기 때문이다. 본회퍼에 따르면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원수를 형제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원수들도 형제들처럼 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 그러한가? 왜냐하면 제자들은 오직 자신들을 형제처럼 대해 주신 분의 사랑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며, 그분의 원수였던 자신들을 용납하시고 그분의 형제들처럼 그분의 사귐 안으로 인도하신 분의 사랑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매인 자들의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 다르다. 본회퍼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다운 것은 “특별한 것, 비범한 것, 비상한 것, 당연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더 나은 의’에서 바리새인들을 ‘능가하는 것’,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더 나은 의’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비범성’을 보여준다. ‘비범성’의 본질은 고난과 순종 가운데서 십자가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독특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함께 고난에 동참하며, 이것으로 세상을 넘어서고 이기는 ‘비범성’이다.


4. ‘비범성’과 ‘은밀성’의 긴장관계에 놓인 제자도


    예수 그리스도는 산상설교의 5장에서 강조한 ‘비범성’이 가지는 이중적 구조를 6장에서 설교한다. 5장에서 ‘비범성’의 당위성과 추구를 강조했다면, 6장에서는 ‘비범성’의 그림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제자들은 ‘비범성’에 주의해야 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비범성을 행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의 행동은 비범해보여야 하고,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여야 하지만, 비범함과 더 나은 모습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제자의 길은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중단되어 버릴 것이다. 제자의 길에 목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비범성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비범성은 일상적이어야 한다. 일상적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비범성이 추구해야할 무언가가 아니라 존재적인 당연함이다. 그렇기에 제자는 비범성을 비범하게 여기지 않고 일상적인 순종으로 여긴다. 제자는 일상적인 비범성 속에 자신의 특별함을 숨기고 그리스도의 특수함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인의 비범성은 은폐와 계시의 이중적 구조 안에서 있으며, 십자가가 이 둘의 통일성을 나타내준다. 제자는 오직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인다. 그래서 제자는 비범성을 바라보지 않고 예수만을 바라보고 따른다.

    예수는 제자에게 일상적인 비범함을 위해 세 가지 은밀성을 강조한다. 이는 각각 선행과 기도와 경건이다. 예수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앞서 살펴 본대로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목적이 되지 않는다면 제자의 선행은 그리스도의 선행이 아니라, 자신의 선행이다. 숨겨짐과 드러남은 역설적인 한 짝이다. 스스로가 숨겨진 선행을 드러내는 것은 스스로의 영광을 취한 것이요, 하나님이 친히 드러내실 때까지 기다리는 자는 하나님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행과 마찬가지로 기도의 은밀성도 강조한다. 기도도 과시 행위로 왜곡할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 길거리에서 기도하는 것은 왜곡의 단순한 형태이다. 기도는 자기 스스로를 기도의 관찰자로 세울 수 있으며, 자기 앞에 기도할 수 있다. 스스로의 기도에 만족하는 기도는 은밀성을 깨뜨린 모습이다. 기도는 오직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호소이다. 그렇기에 기도는 경건의 만족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기도는 제자의 길에 대한 진실한 질문이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는 ‘주기도문’으로 기도의 본질을 완전히 밝혀준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금욕의 은밀성에 대해서 강조한다. 금욕은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기 위한 자발적 훈련이다. 물론 금욕자체만으로 육체의 의지가 사라지거나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금욕은 육체의 반역을 제어하고 절제하는 것에 유익하다. 금욕은 수동적 고난이 아닌, 자발적 고난이다. 자발적이기에 이 고난은 자기의 과시가 될 가능성이 더욱 높다. 그렇기에 예수는 금욕하는 것을 표내지 말고 겸손하게 금욕하며, 금욕을 무거운 짐이 아닌 감사함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비범성’은 특별하거나 특수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매인 제자들이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 그들의 비범한 모습은 일상적인 ‘삶’이 된다. 과시하거나 예찬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라, 무던히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된다. 비범한 제자의 삶은 일상 속에서 은폐되었다가 아름답게 발견될 진주와도 같은 것이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에서 해석하는 ‘산상수훈’의 내용을 중심으로 제자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본회퍼에게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한 율법, ‘더 나은 의’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비범한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은 ‘비범성’을 가진 존재이다. 제자는 ‘비범성’을 살아내는 존재이다. 비범성을 팔복을 통해 강조되는 ‘포기’를 실천함으로서 실현이 가능하다. 재물, 행복, 평화, 권리, 자기 의로움, 존엄성, 자기기준, 폭력 을 포기하는 것으로 비범성은 시작된다. 그리고 비범성의 형태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즉 포기해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본회퍼는 사랑을 통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며 그 사랑의 완성을 ‘원수사랑’으로 설명한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비범성을 나열하는 동시에 비범성이 가진 역설적인 그림자를 설명한다. 진정한 제자는 비범성의 그림자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다. 비범성은 늘 자기교만이 될 수 있다. 비범성이 신앙의 목적이 될 때 비범성은 그리스도를 나타내기보다, 자기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본회퍼는 ‘은밀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비범한 삶이 목적이 아닌, 일상이 되어야 한다. 누구한테 내세우거나 자랑할 목적이 아닌, 일상적으로 살아내고 감당하며 자랑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삶’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이웃에게 은밀하게 행해야 한다.

    제자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신앙인의 삶이다. 본회퍼의 제자도를 살펴보면 두 극단의 긴장관계에서 고뇌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된다. 비범성을 추구하는 삶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레 ‘욕망’하는 삶이지만, 반대로 은밀성 유지하기는 그 어느 것보다 어려운 삶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은 실천하고, 자신이 참된 제자라고 어필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말씀은, 본회퍼는 그 마저도 ‘포기’할 것을 강조한다. 침묵이 없이는 결코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높은 목표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마력을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다. 본회퍼의 글을 통해 제자의 삶은 높은 자기성취와 자기어필이 아닌 그리스도와 같이 겸손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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