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절반을 넘으며
호기롭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펼쳐들고 7월 말까지 읽어보겠다고 다짐했지만, 참 주제넘은 소리였다. 매일마다 엉덩이를 붙이고 꾸역꾸역 읽고있는데 이제사 절반을 읽었다. 약 600페이지 중 300페이지를, 총 2편으로 구성된 목차 중 1편을 읽은셈이다.
아직 반을 더 읽어야하지만, 이 책을 읽고자하는 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배경지식’, ‘바탕지식’이다. 철학의 어려움은 같은 용어를 두고도 철학자마다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칸트의 ‘현존(재)’와 자신의 ‘현존재’가 다름을 하이데거도 설명한다. 철학은 어쩌면 존재에 대한 철학자 나름의 규정이기에 같은 언어(표상)를 다르게 규정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렇기에 <존재와 시간>을 읽으려면 기본적으로 데카르트, 칸트, 실존주의,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개념정리와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개념정리가 안되어있으면 오독과 난독 증상을 충분히 일으킬 수 있다.(물론 나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참 어렵다. 읽을수록 어렵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라는 실존적존재의 존재론을 규명하면서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철학작업을 시도한다. 그렇기에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마주하는? 붙어있는? 결부되어 있는? ‘세상’과 ‘타자’ 그리고 ‘자기’의 총체적 관계안에서 존재를 바라본다. 이를 ‘세계-내-존재’라 한다. 이 존재가 가진 실존적, 존재적 본질을 실존론적-존재론적 구조로 해석하는 작업이 어디... 쉬운일인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 머리도 너무 아픈 이론이다.
그럼에도 어제 책을 읽다가 하이데거가 말하는 <잡담>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워 조금 나누어보고자 한다. 현존재는 현상을 ‘이해’(밝혀짐이라고도 하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해와는 다른 뉘앙스다. 주어진 현상을 그대로 인지하는 상태라고 생각한다.)-‘해석’(이해에 대해 파생된 양태)-‘발언’(판단하고 공유하는 것)하면서 본래적 존재를 추구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말’(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말 중에서도 <잡담>은 본래적 존재에 대한 깊은 탐구보다 비본래적 존재로 여전히 존재하도록 만든다. 잡담은 질문과 고민 사색없이 허공에 떠있는 근거없는 이야기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잡담들은 일상적인 말들이 되어 현존재의 비본래성에 안주하도록 만든다.
물론 하이데거는 잡담을 악이나 죄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인간의 실존을 구성하는 구조중 한 요소로 본다. 즉 가치중립적인 무언가이다. 말과 잡담 등의 설명을 통해서 하이데거는 말의 이중성을 강조하는듯하다. 언어는 현존재를 본래적 존재로 나아가게도 하고, 비본래적(일상적) 존재로 안주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말과 언어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설교가 떠오른다. 오늘날 설교, 나아가 내가 매주하는 설교를 생각해본다. 설교는 존재자체이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해주는 중요한 통로이다. 말과 언어는 충분히 그런 힘과 기능을 가진다. 설교는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자기다움을 발견하도록 견인해주며, 그리스도를 쫓아가도록 실존적, 전인적, 존재적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낸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다움을 ‘은혜’라고 규정하지 않는가..... 하지만 말씀의 열매가 여전히 우리에게 기다려지는 동시에 결여되어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설교가 잡담이되고 있기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잡담이 난무하듯 설교의 홍수가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닐까.....성도의 일상은 여전히 자연인의 일상으로 남아있는 것 아닐까....
하이데거는 잡담을 다루며 동시에 ‘침묵’을 강조한다. 잡담은 공중에 떠다니는 말을 가지고 아무나 할 수 있으나, 침묵은 자기의 언어로 할 말이 있는 사람만이 지킬 수 있는 상태이다. 오직 존재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질문한 사람만이 침묵한다. 침묵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존재에 대한 언어는 소화도 어렵고 규정하기도 힘들며 그것을 타인과 나누고 공감하기도 어려울 것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언어는 기도와 관상과 질문과 사색끝에 얻어낸 소중한 언어이기에 침묵이라는 존재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아닐까.....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지 말라는 예수의 말이 생각난다(성서신학적 연관성은 모르겠지만...) 동시에 오늘날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이 침묵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