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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호 Jul 17. 2020

밥상이야기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를 읽고

2018년도 가을학기 ‘현대인을 위한 기독론’ 에서 기말과제로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서술한 적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신앙고백의 기초이며,  그 답변으로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당시 나의 답변은 오늘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식구’라고 답했다. 해당과제는 한국의 가족형태 변화와 가족해체문제를 컨텍스트로 다루며 글을 써내려갔었다. 당시 ‘가족’이라는 단어를 선택하려 했으나, 그것보다 더 따뜻한 개념을 고민하다보니 식구가 떠올랐다. 밥상은 가족을 구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그래서 밥먹는 입숫자를 나타내는 ‘식구’가 가족의 대체어가 되지 않는가?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식구가 되어주신다. 언제나 밥상에서 우리를 환대해주신다. 그리고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식구로 모인다. 그래서 교회는 ‘가족 밖의 가족’이다.

본 책의 제목은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이지만, 밥먹는 이야기이다. 본 책은 푸블리우스라는 로마인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가정의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받은 내러티브를 소개하고 있다. 그 식탁은 제3자가 보기에 다양한 갈등요소들이 곳곳에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식탁에서 그 갈등요소들이 걸림돌이 되지 않음을 푸블리우스의 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 식탁에서는 처음 초대받은 비신자와 신자가 함께 있고, 주인과 종이 겸상하며, 과부에게 안부를 묻고, 어린아이들과 놀이가 이루어진다.

처음 초대받은 푸블리우스는 브리스길라의 안내에 따라 잔치의 가장 상석에 앉게 되었고, 함께 있는 사람 중 고위관리였던 아리스도불로는 보다 낮은 자리에서 자신의 종인 루이스와 마주보고 앉았다.(33-34p) 온기가 가득한 식탁에는 따뜻한 인사가 오고 갔으며, 무례하거나 불편한 분위기가 없었고 시종일관 자유로우나 덕스러운 모임이 진행되었다. 그들은 딱딱한 미사여구나 종교적 예전을 거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푸블리우스도 이질감없이 식사에 참여했다. 아굴라는 단지 떡을 떼며 그리스도를 기억하도록 잠깐 기도하였다. 식탁모임에서 신을 위해 떡을 봉헌하거나 바치는 행위는 없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주었는지를 기억하는 자리였다.    

식사자리에는 로마사회에서도 비싸서 함부로 먹지 못했던 고기가 각 접시마다 나왔다. 이를 보고 푸블리우스는 “틀림없이 오늘을 위해 한 주 내내 아껴두었을 거라는 생각”(43p)을 했다. 그런데 식사자리 한 켠에서 푸블리우스의 눈을 의심케하는 장면이 있었으니, 고위관리 아리스도불로가 종의 접시 위에 음식을 덜어주는 모습을 보게 되지 않는가? 도대체 이 식탁의 자리는 어떤 성격의 자리인가? 종교적 의례도 아니고, 세상의 규율과 예의를 지키는 식사자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례하거나 미개한 식사자리도 아니다. 오묘하고 신비한 예의와 질서가 그들 안에 있었다. 그들은 식사를 하며 다양한 문제에 대해 토론하였다. 병자의 치유, 종의 자유 등 이웃과 사회, 교회 안의 문제 등에 대해 토론하였고 의견의 일치를 위해 힘썼다. 그러다가도 그들은 이 식탁의 자리가 그리스도와의 사귐의 자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포도주의 잔을 들며 기도했다. 아굴라는  “이 포도주는 예수님이 자기의 죽음을 통하여 이 사귐의 끈을 창조하신 분임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또한 언젠가는 우리가 그분의 식탁에 앉아 얼굴을 맞대고 먹으면서 함께 누릴 사귐의 약속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잔을 함께 마실 때 이 둘을 마음에 새기면서 감사합시다.”(55p)라고 기도했고 식사의 자리는 마무리되었다.

푸블리우스에게 이 식탁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하나로 단정지을 수 없는 복잡한 충격들이 굉장히 연속적으로 밀려왔을 것이다. 사실 전도사인 나에게도 이 자리는 굉장히 충격적이고 가슴이 뛰는 장면들의 연속이다. 사자와 어린양이 뛰놀고, 독사와 어린아이가 장난치듯 주인과 종이 겸상하고 서로를 챙기는 장면이 어찌 가능한가? 쉽게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서 일상의 끼니를 아끼는 집주인의 정성을 우리는 어디에서 경험해볼 수 있는가? 우리는 다양한 의견의 일치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대화하고 때로는 토론하는 공동체를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우리는 그곳이 바로 교회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이 밥상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들을 건내고 있다. 교회는 식구가 되어가고 있는가? 당장 코로나19로 식사교제를 못하는 우리에게 식구의 의미는 어떤 방식으로 새롭게 재고되어야 하는가? 예배는 자연스러운가? 온기가 있는가? 다양한 의견들이 교회에서 무례하지 않게 논의될 수 있을만큼 건강한가? 무엇이 2000년전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가? 바로 그 예배와 공동체 속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이 살아있어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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