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을 기억할 수 있는 관계란 얼마나 운이 좋은가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어
1.
Y가 나를 데려간 곳은 화양연화에나 나올 법한 선술집이었어
묘하게 붉고 침침해서 밖은 아직 밝은데 거기만 밤이었지
대체 무슨 술을 팔지, 어떤 안주가 있을지 짐작도 안 되던 공간
홍콩인가 싶다가 중국 본토인 것도 같고, 그냥 중국집 같기도 하고 그랬거든
별들이 소근대는 홍콩의 밤거리 말고 외곽의 허름한 뒷골목 술집에서 너를 처음 봤어
우리는 그렇게 만났어
2.
그날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대부분은 기억나지 않아
네가 Y에게 소개했던 LP바를 나도 좋아한다는 이야기 정도려나
하나 기억나는 게 있어
취기인지 빛이 드리워서인지 붉던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
기분을 가늠할 수 없이 오묘하던 눈빛과 입꼬리
그때 넌 미소 지었던 걸까, 슬펐던 걸까
3.
기억은 서랍 속 잡동사니 같아서 꺼내면 꺼내는 대로 끊임없이 흘러나와
그저 거기 있을 뿐이었다가 끄집어내는 순간 의미라는 꼬리표를 달고
4.
아 기억났어
그날 나, 그 무렵 즐겨 입던 자주색 체크무늬 셔츠 차림이었어
옷장 깊숙이 넣어 뒀던 그 셔츠를 작년에야 버린 기억이 나네
5.
처음을 기억하는 관계는 끝을 기억하는 관계와는 달라
그래서인지 처음과 끝의 기억을 모두 가진 너와는 찬란하고도 참담했어
6.
여름비가 죽도록 내리던 저녁, 그 터미널
세상이 끝날 것처럼 비가 오던 다른 밤, 그 방
내가 기억하는 두 번의 끝
나는 이제 그 도시에 가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