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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은 언제 현실이 되는가: 빛의 질서와 혼합현실

빛을 재현하는 순간, 가상은 현실이 된다

by 조수민 라이트랩


현실의 빛과 호흡할 수 있는가


AR(증강현실)과 MR(혼합현실)의 차이는 단순한 그래픽 해상도의 문제가 아니다. 가상의 대상이 지금 내가 있는 공간의 현실의 빛과 호흡하느냐, 그 여부가 곧 몰입감의 성패를 좌우한다. 인간의 뇌는 작은 불일치에도 민감하다. 그림자가 공간의 빛 방향과 다르거나, 색온도가 주변과 어긋나면 금세 그것을 ‘비현실적’이라고 간파한다.



8d2cd578-d243-4cc5-a55b-5811418d15df.png.jpeg 올라퍼 엘리아슨의 <분더카머> ( 출처: Acute Art )



콜롬비아 대학의 실험: 사진 속 빛을 읽어내다


이 난제를 정면으로 다룬 것이 최근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서 발표한 연구다. 연구진은 사진과 영상 속에 숨어 있는 단서―사물의 표면에서 일어난 반사, 유리창을 통과하며 꺾인 굴절, 벽에 번진 확산광―를 분석해 광원의 위치·세기·색을 추정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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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tiotemporally Consistent Indoor Lighting Estimation with Diffusion Priors (MUTIAN TONG,2025)

(출처 : https://arxiv.org/abs/2508.08384?utm)



예를 들어, 방 안의 테이블 위 컵이 드리운 그림자는 단순한 어둠의 얼룩이 아니라, 빛의 방향과 강도를 알려주는 신호다. 이런 수많은 단서를 알고리즘이 조합하면, 공간 전체의 빛 환경이 예측된다. 연구진은 이렇게 얻은 데이터를 가상의 미러볼(거울 구체)에 적용했다. 그 결과, 증강현실 속 대상은 실제 공간의 조명 아래 자연스럽게 빛을 받고 그림자를 드리우며, 마치 원래 그 자리에 놓여 있던 물체처럼 보였다.




빛은 왜 현실을 규정하는가


여기서 중요한 통찰이 나온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은 사실 빛과 물질이 만들어낸 패턴을 뇌가 해석한 결과일 뿐이다. 현실은 본질적으로 빛의 질서로 짜여 있다. 따라서 빛을 동일하게 재현하는 순간, 가상은 더 이상 가상이 아니게 된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그림자’는 진실을 가리지 못하는 허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림자를 넘어, 그 그림자를 만든 빛 자체를 복제하려는 시대에 들어서 있다. 칸트가 인식의 틀로 제시한 공간과 시간 역시 결국 빛이라는 매개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MR 기술은 이 빛의 질서를 포착하고 모사함으로써 우리의 현실 감각을 다시 쓰고 있는 것이다.




조명 디자인과 MR의 만남


이 연구는 단순히 MR 기술에만 의미가 있지 않다. 조명 디자인과 건축 설계에도 깊은 시사점을 던진다. 지금까지 조명은 대체로 ‘빛을 더하는 행위’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MR 시대에는 ‘빛을 읽고 재현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


예를 들어, 디지털 트윈 기반의 조명 설계는 공간의 조도, 색온도, 반사 특성까지 데이터화하여 시뮬레이션한다. 여기에 MR의 빛 인식 기술이 더해지면, 사진 몇 장만으로도 현장의 빛 환경을 재현하고, 그 안에 놓일 조명의 효과를 미리 검증할 수 있다. 이는 건축가와 디자이너에게 시행착오를 줄이고, 사용자에게는 보다 자연스러운 빛 환경을 제공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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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된 현실, 빛이 만드는 공동 경험


빛은 개인적 착각을 넘어, 사회적 현실까지 규정한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빛을 경험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공유된 현실’로 인식한다. 만약 MR이 공간의 빛을 정확히 재현한다면, 여러 사람이 동시에 같은 가상을 같은 현실로 경험할 수 있다. 이는 공연장, 교육, 도시 공간에서 새로운 형태의 공동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앞으로는 콘서트 무대의 조명뿐 아니라, 가상 무대의 빛도 동일하게 공유될 수 있다. 건축물의 벽돌 대신, 빛으로 짜인 현실이 사람들의 공동 기억을 형성할지도 모른다.




빛, 경계를 허무는 매개체


최근 『먼저 온 미래』를 읽고 있다. 책에서 보여주듯, 불가능해 보이던 기술은 어느 순간 가능성으로 전환된다. 빛 환경을 읽어내는 이 기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믿어온 현실은 생각보다 취약하며, 단 몇 가지 핵심적인 빛의 질서만 충족되면 가상은 금세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결국 혼합현실의 성패는 그래픽 카드의 성능이 아니라, 현실의 빛과 호흡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빛은 물리학적 현상이면서 동시에 철학적 주제이고, 과학적 계산이면서 동시에 미적 경험이다. MR은 이 빛을 얼마나 정밀하게 읽고, 재현하고, 나눌 수 있는가에 따라 새로운 층위의 현실을 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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