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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 Mar 30. 2019

나의 메르헨 01_ 나의 말레꼰

아바나, 2019.03.22


열흘 만에 다시 쿠바로 돌아왔을 때 누군가 물었다. “쿠바가 정말 좋으셨나 봐요?”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무어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얼버무리며 웃기만 했다. 사실 쿠바를 다시 찾은 건 이곳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그냥 조금 쉬고 싶어서였으니까.


물론 그 마음이 굳이 열흘 전에 여행하고 떠나온 이곳을 다시 찾은 명확한 이유는 될 수 없었다. 느긋하게 쉬어 갈 곳이라면 나의 마지막 여행지이자, 중남미를 여행하며 만났던 많은 사람 가운데 단 한 명도 별로였다고 말하는 이가 없었던, 음식이 맛있고 물가가 저렴하며 아기자기하고 예쁘장하기까지 하다는 멕시코가 더 어울렸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멕시코 5주 일정을 포기하면서까지 쿠바로 돌아온 까닭을, 호세 마르티 공항에 내려 묵직하면서 어딘지 달뜬 듯도 한 아바나 공기를 다시 들이키면서도 나는 찾지 못했다.


아바나 숙소는 말레꼰과 가까웠다. 말레꼰은 스페인어로 ‘방파제’라는 뜻이며, 올드 아바나 지역인 비에하에서부터 아바나 부촌인 미라마르로 가는 터널 앞까지 8km에 걸쳐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일컫는다. ‘아바나’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방파제에 부딪혀 거칠게 부서지는 파도와 그 사이로 올드카 한 대가 유유히 지나가는 장면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워낙 상징적인 장소인 데다 숙소 근처여서 지난번에도 일상처럼 이곳을 찾았었다. 그런 탓에 다시 아바나로 온 첫날도 나는 자연스레 말레꼰으로 발길을 옮겼다.



잔뜩 얼굴을 찌푸린 구름이 한숨을 토해 내듯 하늘에서 빗방울이 무겁게 떨어지는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늘 말레꼰을 따라 줄지어선, 축제 행렬 같던 인파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무엇에 그리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며 달려오다가 방파제에 철썩하고 몸을 박으며 산산이 흩어지는 파도가 메우고 있었다. 세상에 불만 가득한 사춘기 소년 같은 파도에 길이 막히자 나는 바다로 향하던 시선을 말레꼰 맞은편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파도와 바람과 싸우다 패잔병처럼 지쳐 버린, 그러나 초라해 보이지 않으려 애써 고개를 꼿꼿이 든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건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벗겨진 칠, 허물어진 귀퉁이, 그 틈으로 삐죽하니 솟은 철근…그리고 그 위로 아는 얼굴 하나가 겹쳐졌다. 제 깜냥을 모른 채 무작정 세상으로 달려들던, 부닥치고 넘어지면서도 실패는 아니라고 중얼거리던, 자꾸만 허물어지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웃음으로 덧칠하던, 가장 익숙하면서도 제일 낯선. 바로 내 얼굴이었다.  


철썩! 또다시 파도가 제 몸 아픈 줄 모르고 방파제로 달려와 부서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굳이 다시 쿠바로 돌아온 이유를.



아마도 나는 그리웠던 모양이다. 넘어서지 못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미련스럽게 방파제에 몸을 부닥치며 깨지는 파도가, 부서진 현실 속에서도 마음만은 초라해지지 않으려 애쓰는 건물이, 그 미련함과 서글픔을 모두 끌어안고 아름다움이 된 말레꼰이 말이다.


오늘도 말레꼰을 거닐면서 생각한다. 앞으로 누군가 내게 쿠바가 정말 좋으셨나 봐요?”라고 묻는다면 이제 나는 더 이상 얼버무리지 않고 활짝 웃으며 또렷하게 답하겠지, “네!”하고. 그리고 덧붙이겠지, 그건 다른 무엇도 아닌 오로지 ‘나의 말레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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