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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 Oct 12. 2019

그때 그곳에는 요정과 마법사가 있었다

권교정_헬무트


ⓒ 권교정


『헬무트』를 떠올리면 늘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13세기 독일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물이어서인지(13세기, 독일, 판타지라는 낱말이 내게는 모두 다른 세상 낱말처럼 들리니까), ‘그때 그곳에는 요정과 마법사가 있었다’라는 부제 때문인지, 1권 제1장 제목이 ‘모든 모험의 시작’이어서인지, 이 책이 나온 지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 그 모험의 끝을 보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헬무트』는 중세 독일의 어느 지방 영주인 율겐이 젊은 시절에 만난 무신론자 ‘헬무트’를, 그와 함께한 여정에서 보고 듣고 깨달은 것을 뒤늦게나마 세상에 알리려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 권교정


중세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나 신비로운 존재(요정, 마법사 같은)는 무조건 이교도로 규정하고 지독하게 탄압하던 시대였기에 당시 교황청과 독일 교회는 무신론자인 헬무트를 잡으려고 갖은 수를 쓰나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러던 차에 젊은 율겐은 어떤 이유로 헬무트를 잡는 데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지목되고, 그 일을 맡겠냐는 제의를 받는다. 마침 결혼 때문에 명예가 절실했던 율겐은 그 제의를 받아들이고 신분을 숨긴 채 헬무트에게 접근한다.


이 무렵 율겐은 “골수까지 평범 그 자체인 중세 유럽인”이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율겐도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말하는 헬무트에게 “어떻게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 ‘신은 없다’란 생각을 할 수 있”느냐며 세상 진지한 얼굴로 반박한다. 그러나 헬무트와 동행하며(사실은 잠복이지만) 율겐은 그가 이전까지 알던 “정신이 똑바로 박힌”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과 마주한다.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신의 존재를 묻고, 신의 가르침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종교 권력에 끔찍하게 불태워지고 처참히 사라진 존재들을 기억하고, “자신의 신앙을 남에게 강요하는” 일은 부당하다고 말하는 세상 말이다.


안타깝게도 『헬무트』는 미완이라 새로운 세상과 마주한 율겐이 모험의 끝자락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이 과정에서 이단 척결이라는 임무를 맡은 첩자로서 헬무트에게 접근한 전형적인 중세 유럽 청년의 마음속에도 “20년간 살아오면서 당연히 참이고 진리라고 믿어오던 여러 가지 것들이 오히려 부당하고 불합리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심”이 싹튼 것은 분명하다.


ⓒ 권교정


『헬무트』는 중세 교회와 무신론자(또는 기독교 교리를 따르지 않던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폭력과 탄압, 희생과 투쟁의 과정을 보여 주면서 ‘종교(신)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그렇다면 20세기 한국에서 태어난 무신론자이자 종교(그것도 중세 기독교)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던 고등학생이 이 낯선 이야기에 그토록 빠져들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중세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 문제를 바탕으로 자유와 평등, 다양성과 관용 같은 보편적 가치를 신비롭고 아름다우며 유쾌하고 엉뚱한 캐릭터들을 내세워 ‘모험담’이라는 형식으로 몹시 흥미롭게 그려 냈기 때문이다.


환상과 현실 사이 어디쯤에 있는 ‘그때 그곳’을 율겐, 헬무트 일행과 함께 모험하며 나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왜 자유와 평등, 다양성과 관용이 중요한지를 배웠다. 하루하루가 혼란스럽던 아이도 어른도 아닌 그 시절, 『헬무트』는 내게 세상을 조금 더 폭넓고 올바르게 바라보는 눈이 되어 주었다.



*헬무트 | 1~4권 | 미완 | 2000년 | 대원씨아이

*모든 그림은 저작권자인 권교정 작가님께 허락을 얻어 실었다. 그림 출처는 교월드(www.gyoworl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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