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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Nov 20. 2022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취미

(11.20)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페스트, 23아이덴티티

  할로윈 데이에 나는 안소니, 대니얼, 피터, 하릅과 함께 캠핑 체어에 앉아서 불멍을 하고 있었다. 안소니는 칭따오, 나는 써머스비, 대니얼은 안동 막걸리, 피터는 기네스, 하릅은 버터맥주를 마시며 아무 말이나 했다. 안소니는 오늘 할로윈 의상으로 엘사의 드레스를 준비했는데 깜빡 잊고 집에 두고 왔다고 했고, 나는 오늘 의상 컨셉은 인어공주라고 말하며 다만 인어공주가 사람으로 변한 후라서 꼬리지느러미 대신 다리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인어공주가 사람으로 변하면 원래 목소리를 잃는 거 아닌가? 피터는 물었지만 나는 아시아인이 목소리를 잃어 말을 하지 않으면 서구 백인 문명 중심사회에 소외된 ‘아시아인의 목소리’를 함의하는 것이므로 디즈니의 ‘정치적 올바름’ 방향성에 따라 한국말을 하는 조건으로 사람으로 변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하릅은 이 대화에 끼지 않고 요즘 핫하다는 블랑제리뵈르 버터맥주 4캔을 차근차근 종류별로(AAA+, BBB+, CCC+, DDD+) 비웠다. 그런데, 고양이가 맥주를 마셔도 되는거야? 안소니가 자이언트 랙돌인 하릅에게 물었고 영어로 말하기 귀찮은 하릅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야옹야옹으로 답했다. 고양이 코스튬이 아니라 진짜 고양이였어? 대니얼이 놀랍다는 듯이 하릅의 꼬리를 잡아당겼고, 하릅은 바로 냥냥펀치를 날렸다. 대니얼이 예상치 못한 일격에 코를 움켜쥐고 고개를 숙이는 사이 귀찮다는 듯이 툭툭 털고 일어나 기지개를 펴더니 사탕을 얻으러 다니는 아이들 틈에 끼여서 지구 종말까지 먹어도 될 정도의 젤리와 사탕을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다들 나에게 해명을 하라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는 묵묵히 맥주를 비우며 다시 불멍을 했다.      


  어색함을 깨기 위해 피터가 각자의 취미에 대해 물었다. 먼저 피터는 뱅앤올룹슨 스피커로 클래식을 들으며 와인을 마시는 것이 취미라고 했다. 다들 입을 모아 와우 감탄사를 내보였다. 그러자 안소니는 요즘 여가시간에 사족보행 운동을 한다고 했다. 사족보행 운동은 말 그대로 동물처럼 손을 바닥에 짚고 엎드려서 뛰고 걷는 운동이다. 머리를 빡빡 민 190cm의 건장한 백인이 강변에서 사족보행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나는 영화 ⌜23아이덴티티⌟에서 제임스 맥어보이가 연기한 비스트를 떠올렸다. 대니얼은 시간이 나면 금속 탐지기를 들고 뒷산에 올라 흙속에 묻혀 있는 유물들을 찾는 것이 취미라고 했는데 최근에는 임진왜란 시대의 탄피를 찾아내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말했다. 뒷산에 산책을 하러 갔다가 우연히 썬글라스를 낀 미국인이 금속탐지기를 들고 마주쳤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국제적 범죄조직을 쫓고 있는 FBI 요원? 탈주한 외계인을 찾는 맨 인 블랙 요원? 둘 다 아니다. 한국역사를 좋아하고 세월에 숨겨진 유물을 찾는 것을 좋아하며 막걸리를 좋아하는 평범한 직장인일 뿐... 다들 특이한 취미를 가졌네. 내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피터가 나에게 취미를 묻자, 나는 단 한 가지의 취미를 가졌다고 말했다. 독서. 이유는 단순했다. 돈이 제일 적게 들고 아무 곳에서나 할 수 있고 대부분 장려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 따르면 독서를 통한 깊이 읽기는 우리 정신의 역사에서 “불가사의하면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인간의 뇌는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천성적으로 산만하게 진화되어 있었다. 그것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7만년전에 발현된 언어는 호모사피엔스에게 기본템으로 주어지고 있는 능력이지만, 문자를 해독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에 학습된 능력이었다. 그러므로 기원전 2500년 파피루스 발명 이후 15세기 이전까지 책과 독서라는 것은 소수의 엘리트들에게나 허용된 고급 매체이자 고도의 정신적 기술이였다. 15세기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 이후에야 그것은 인류 모두를 위한 선물이 되었지만 새로운 기술과 미디어는 우리를 다시 산만함의 본능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우리는 스크린에 펼쳐진 하이퍼링크를 타고 빠르게 훑으며 웹의 세계를 항해하고 띠링 알람 소리에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10초 안에 5개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다. 인지적이고 집중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독서라는 행위는 다시 소수만이 전유할 수 있는 것으로서 되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독서? 피터가 되물었고, 독서... 안소니가 되뇌었고, 독서! 대니얼이 탄식했다. 나는 요즘에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를 읽고 있어. 내가 말하자, 누구? 피터가 되물었고 알베르... 안소니가 되뇌었고, 콜레라!! 대니얼이 탄식했다. 아니, 콜레라가 아니라 코로나였나... 대니얼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나는 땅을 보며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페스트라고...

  누군가가 캔맥주를 우직 우그러뜨리는 소리가 났고 나무는 탁탁 타고 있었고 검은 공기가 화로 주변의 불길을 타고 차갑게 차올랐다.      


※ 아래의 작품들을 언급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니콜라스 카)

23아이덴티티 (M.나이트 샤말란)

페스트 (알베르 까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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