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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브르사비 Oct 14. 2020

비밀 정원을 품은 파리의 작은 미술관, 낭만주의 박물관

미술관에 깃든 이야기를 좋아하든 당신이라면

여행이 아닌, 파리에 머물러 사는 삶을 택했습니다. 매일 보는 파리인데도 문득 새로울 때가 있어요. 그래서 ‘나의 작고 아름다운 파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은, 제가 깊이 좋아하는 파리의 숨은 명소를 소개해 드릴게요.





도가 없었다면 지나쳤을 것이 분명했다. 은밀한 녹색문 너머 담쟁이 넝쿨이 조용히 몸을 흔든다. 빛이 들지 않아 어둡고 좁은 길의 끝에 선 순간 거짓말처럼 환하게 빛이 쏟아지며 1830년에 지어졌다는 우아한 이층 저택이 나타난다. 아치형 창문에 세심한 격자무늬, 차양부터 계단 난간과 벤치까지 온통 민트색이다. 저택 옆의 우측의 작은 샛길을 따라가면 비밀의 화원처럼 숨겨진 정원이 보인다. 그곳에는 정성껏 가꾼 장미와 마가렛이 피어있는 원형의 정원과 외벽이 유리로 된 카페가 자리해 있다.


이백 년은 족히 되었을 나무 아래 커피를 마시는 파리지앵의 옆모습이 고즈넉하고도 아름다운 오후. 이곳에 오면 박물관이 아니라 19세기 파리에 살던 어느 예술가의 초대를 받아 시간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든다.

바로 파리 9구의 낭만주의 박물관(Musée de la vie romantique)이다.



낭만주의 박물관은 네덜란드 출신 화가인 아리 셰퍼(Ary Scheffer, 1795~1858)의 자택 겸 아틀리에를 개조해 1983년에 개관한 곳이다. 아리 셰퍼의 그림뿐만 아니라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를 살아가던 예술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특히 낭만주의 소설가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1876)의 유품과 쇼팽의 왼손을 본뜬 석고상이 유명하다.


아리 셰퍼는 매주 금요일마다 조르주 상드, 쇼팽, 들라크루아, 디킨스, 스트라빈스키, 투르게네프 등 파리의 예술가와 문인, 정치 인사를 집으로 초대해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그의 그림은 신고전주의 화풍이었으나 그가 교류한 사람들이 대부분 낭만주의에 속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는 유럽 여러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났던 19세기 초, 이성과 합리주의, 고대로의 회귀를 추구했던 신고전주의 보다 개인의 감정과 독립성을 중시한 낭만주의가 유행했던 당시의 시대상 때문이리라.



낭만주의 박물관은 총 3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아리 셰퍼의 서재처럼 꾸며진 이곳은 그의 그림과 가죽 커버가 아름다운 수백 권의 책, 그랜드 피아노와 프레데리크 쇼팽(Frédéric Chopin, 1810~1849)의 왼손을 본뜬 석고상이 놓여 있다. 쇼팽의 왼손은 그의 사망 직후 오귀스트 클레장제가 모양을 뜬 것으로 피아니스트치곤 작은 손이지만 섬세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아름답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그림은 바로 이것. 아리 셰퍼의 독일인 사촌인 아리 요하네스가 그린 그림이다.


<Le grand atelier d’Ary Scheffer rue Chaptal>, Arie Johannes Lamme, 1851년


아리 셰퍼가 자신의 그림을 마무리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그의 아내 소피는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는 구석에서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화가의 오른쪽에는 그림 도구가 보관된 나무 상자가 왼쪽에는 그에게 영감을 주곤 했던 미완의 오래된 조각상들이 장식되어 있다. 이 그림 안에는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이 한데 얽혀있다. 이 그림은 말년의 셰퍼가 관심을 가졌던 예술 소재를 보여줌과 동시에 당시 이상적으로 여겨지던 아틀리에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으로 여겨진다.



박물관 본관의 문을 열고 들어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바로 이곳을 그린 그림, <Façade de la maison d’Ary Scheffer>이다. 하늘거리는 나뭇잎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여름날, 부부의 호시절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어진 1층 공간에는 조르주 상드의 가구와 유품 그리고 그녀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그녀는 셰퍼 부부를 정기적으로 방문해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고 한다. 여기 놓인 가구는 노앙 별장에 있던 것으로 두 사람은 쇼팽의 건강 회복을 위해 노앙에서 여름을 보냈다. 부슬거리는 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초상화 속 상드는 우아하면서도 슬퍼 보인다. 우리에게는 오로르 뒤팽(Aurore Dupin)이라는 본명보다 조르주 상드라는 필명이 더 익숙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개성을 드러낸 19세기 여류 소설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데, 평소 남장을 즐겨 하기도 하고 자유연애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여섯 살 연하의 병약했던 쇼팽에게 항상 모성적인 사랑을 베푼 그녀는 쇼팽의 어머니 유스티나에게 보낸 편지에 “당신의 아들을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내 삶을 바치겠습니다”라고 쓰기도 했다. 그들이 함께하던 시기 쇼팽이 작곡한 대부분의 곡은 상드를 위한 작품이었다. 그녀의 오른손을 본뜬 주물과 원고, 작고 아름다운 브로치와 반지를 보며 쇼팽과 상드의 따뜻한 순간을 상상해본다.





2층에는 셰퍼와 들라크루아, 셰퍼의 조카인 르낭 등 낭만주의에 속하는 몇몇 화가의 작품이 있다. 특히 아름다운 작품은 이것이다.


<La malibran dans le rôle de Desdemone>, François Bouchot, 1831년


자세히 보면 그녀의 눈엔 눈물이 고여있다. 무엇이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울게 한 걸까. 뜨거운 사랑을 하다 헤어진 연인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눈매를 한 그녀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있을 듯한 얼굴이다. 누군가의 숨겨진 마음을 훔쳐본 것 같아 나는 공연히 마음이 얼얼해진다.



순한 빛이 비치는 창가, 수백 년의 시간을 간직한 아름다운 얼굴,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낭만적인 이야기가 가득한 낭만주의 박물관. 때론 건조하고 차가운 도시 파리에서 펼쳐진 19세기의 풍경 속에서 나는 자꾸 무방비한 마음이 된다. 찻잔을 들어 꽃향기 가득한 홍차를 마신다. 내가 파리에서 처음으로 깊이 좋아한 곳이 있다면, 바로 여기이다.



Musée de la vie romantique
주소 16 rue Chaptal, 75009 Paris
개관시간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월요일 휴관)
입장료 무료(기획전 유료)
홈페이지 http://museevieromantique.paris.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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