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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Jan 18. 2021

영어 못하는 엄마의 이유 있는 자신감

'엄마표 영어'에 대한 생각



나는 영어를 못 한다. 정말 못 한다.



사교육과 무관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 흔한 피아노 학원, 속셈 학원에 가본 적이 없고, 과외를 받아본 적도 없다. 선행학습을 해본 적도 없으니,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게 나는 늘 처음 배우는 거였다.



중학교 1학년에 영어 과목을 처음 배우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중학교 입학을 목전에 두고 알파벳을 외웠다. 알파벳을 알아도 단어를 읽을 수 없는 걸 알고, 집에 있는 백과사전에서 발음기호 설명을 찾아 읽었다.



그때, '오'와 '어'의 중간 발음이라는 게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중간 발음을 내려고 아무리 애써도, 어떤 땐 '오'로, 어떤 땐 '어'로 소리 났다. 발음을 책으로 배우니 당연한 결과였다.



수학 능력 시험을 봤다. 외국어 영역의 점수는 형편없었지만, 다른 과목의 선방으로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 특수교육을 전공한 게 다행이었다. 1학년부터 영어 원서로 된 전공 서적을 읽어야 했지만, 듣고 말하기가 아니라서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특수교사 임용고시는 영어 능력까지 평가하지 않았다. 내가 맡는 아이들은 한글 교육이 우선이었다. 고로, 영어를 가르칠 일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모국어만 제대로 알고 살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나니 모든 게 달라졌다. 영어를 평생 손 놓고 살 수 없는 운명임을 깨달았다. 자식 공부 앞에서 약해지는 나도 어쩔 수 없는 부모였다. 내 아이는 나처럼 '공교육 실패 사례'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율주행차가 나오는 날까지 버티겠다고 우기다가, 결국 못 기다리고 운전면허를 딴 것처럼. 완벽한 외국어 번역기가 상용화되는 날까지 버티려던 나는 이번에도 못 기다리고 영어를 다시 집어 들게 된 것이다.






영어 못하는 엄마의 엄마표 영어



<엄마표 영어>라는 게 있다고 했다.



말 자체로는 조기교육이나 선행학습, 사교육, 지독한 교육열과 같은 키워드가 떠오르는 말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학원을 덜 보내려고 하는 게, 엄마표 영어고, 주입식 교육을 안 시키려고 하는 게, 엄마표 영어라고 했다.



노래, 그림책, 영상물 같은 흥미로운 도구로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영어를 익히는 정도는 부담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어 수준은 'baby'인 내게 'baby'를 위한 영상과 그림책이 수준에 딱 맞았다. 아이와 같이 쉬운 것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아이가 못 알아들을 때는 나도 못 알아들었고, 아이가 어버버버할 때 나도 어버버버 옹알이를 했다. 마치, 엄마는 영어유치원 출석번호 1번 원아고, 해님이는 출석번호 2번 원아인 것처럼 말이다.



영어 노래가 나오면 아이보다 두세 배 더 크게 목청껏 불렀다. 율동 동작도 과장해서 더 열심히 따라 했다. 아이가 제대로 보고 듣지 않고 있어도 그림책을 소리 내 읽어댔다. 동물이나 과일 이름, 도형이나 색깔 이름도 괜히 소리 내어 말해보곤 했는데, 아이가 들으라고 하는 의도보다는 내 발음 연습에 목적이 있었다.





영어울렁증으로 외국인 앞에선 얼굴이 빨개지고 머리는 하얘져 입 한 번 떼지 못했던 내가, 이상하게도 아이 앞에선 당당하고 뻔뻔해졌다. 제멋대로 떠들어도 아이 앞에선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 발음이나 틀린 문법을 지적하거나 무안을 주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믿는 구석도 있었다. 같이 배우기 시작했더라도, 내가 아이보다 조금 앞설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내가 아이와 달리 영어를 읽을 수 있다는 것! 반칙 같지만, 나는 영상의 자막과 그림책의 글밥을 미리 읽은 덕분에 아는 척을 좀 할 수 있었다.


 

노래를 부를 때, 간주 중에 괜히 한 번 더 소리쳐볼 수 있었다. 아이가 애니메이션의 내용을 이해 못 했을 때, 중간중간 설명해 줄 수 있었다. 음원을 들으며 책을 읽을 때, 적절한 타이밍에 책장을 넘겨줄 수도 있었다.



영어를 못하는 엄마이기에 선생님처럼 가르칠 수가 없었다. 대신, 친구처럼 두세 살 터울의 형제처럼 같이 놀 수 있었다. 내가 가르쳐주는 거라 생각하지 않으니 편했다. 친구나 형제끼리 서로 혀 짧은 발음으로 대화하고 논다고, 나쁜 발음을 배울까 무서워 입 다물게 하진 않으니까, 아이가 내 비루한 발음을 따라 할까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연습이었고, 아이는 아이대로 연습이었다. 많이 놀고, 많이 대화하다 보면 저절로 느는 게 말이고, 언어라고 생각했다. 영어라고 다를 게 없다 싶었다.






영어를 못하는 엄마만 할 수 있는 것



함께 배우는 것. 그것만이 영어를 못하는 엄마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그게 우리 아이에게 가장 적합하고 효과적인 방식임을 알게 되었다. <육아고민? 기질육아가 답이다>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이제 5세가 된 첫째 해님이는 질서나 규칙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자리에 앉혀 놓고 뭔가 해보려 해도 탱탱볼처럼 여기저기 튀어 나가기 바빴다. 학교에서는 나도 꽤 권위 있는 교사였는데, 집에서는 체면 구겨지는 일의 연속이었다. 근엄한 말투를 해도 매번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책에 포함된 기질 테스트를 해보니, 해님이는 '활동성이 높인 민감성 기질'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동안 육아가 어려웠던 이유는 기질상 까다로운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아이를 가르치는 방법으로 책이 제시한 것이 바로 '같이 배워보기'였다. 내가 이미 하고 있었던 것과 일치했다.



이 기질의 아이들이 인내와 노력을 통한 성취감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방법으로 부모가 함께 무언가를 배워보는 것을 권합니다. 함께하는 배움은 가족의 문화가 되고,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되며, 아이로 하여금 부모의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인내와 노력을 좀 더 기울일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최은정 <육아고민? 기질육아가 답이다!> 중에서



'같이 배워보기'라는 꽤 괜찮은 방법이었다.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 '배움'이라는 것 자체를 배워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모르는 분야를 접근하는 엄마의 방식은 아이에게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었다.



우선 배워야 할 것에 관심을 갖는 것, 호기심을 느끼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또, 집중하고 경청하는 태도가 뭔지 보여줄 수 있었다. 계속 들으려 하는 것, 혼자 중얼거리며 연습해보는 것, 일상생활에서 적용해보는 것, 틀려도 기죽지 않고 다시 해보는 것도 직접 보여줄 수 있었다.



아이는 엄마를 통해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신명 나는 일인지 저절로 알게 될지 몰랐다. 이 모든 게 엄마가 의도하지 않은 학습 효과였다. 엄마가 영어를 못 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였다.



생각해 보면, 내가 해박하게 알고 있는 분야였다면 욕심을 부렸을 것이다. 억지로 앉혀서 가르치거나, 칭찬과 보상으로 구슬리거나, 스티커를 주는 등의 전략을 활용했을 것이다. '이거 쉬운 건데 왜 모르지?'라며 답답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엄마의 답답한 정서가 어떤 방식으로든 전달되어 아이에게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영어 애니메이션의 웃긴 장면에서 왜 웃기는지 모르는 사람이라, 똑같이 못 알아듣는 딸의 심정을 잘 이해했다. 처음에 안 들리다가 다시 보면 새롭게 들리는 단어가 어떤 것일지도 금방 알았다. 그래서 그 단어부터 옆에서 여러 번 언급해 줄 수 있었다. 아이보다 많이 앞서 있는 게 아니라, 단 한 발 앞서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어 못하는 엄마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이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나는 손을 잡고 끌어당기는 것만이 부모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평생이라는 긴 레이스를 뛰고 있는 아이 옆에서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함께 달리는 게 더 중요한 역할인 것 같다.



페이스메이커와 함께 뛰는 마라톤 경주자는 다른 경쟁자를 견제하거나 경쟁하는데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기 페이스를 수월하게 지킬 수 있다. 옆에 자신을 지지해 주는 든든한 동료가 있기 때문이다.



페이스메이커와 함께 달리면, 인생이 중요한 시합이 아니라 일상적인 연습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주어질 긴장감이라면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무게 잡고 임해야 할 일은 앞으로도 많을 테니 말이다.



당장은 천천히 뛰고 싶으면 천천히 뛰고, 빨리 뛰고 싶으면 빨리 뛰고, 뛰고 싶지 않으면 앉아서 쉬라고 하고 싶다. 우선은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고 싶다. 그 대신 옆에서 뛰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 알려주고 싶다.



<아이 엠 샘>이라는 영화가 있다. 7세의 지능을 가지고 딸을 키우는 아버지 샘의 이야기다. 딸은 어느새 7살이 되어 아버지의 지능을 추월한다. 난 우스갯소리로 주변에 이야기한다. 언젠가 해님이의 영어 실력이 나를 앞설 거라고. 영화 속 샘처럼 나도 그걸 받아들여야 할 날이 올 거라고.



해님이는 벌써부터 특정 영어 발음이 나보다 좋다. 'Jelly'를 달라는데, 그 발음만큼은 원어민 수준이다. 엄마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장하는 아이의 습득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울 것이다. 언젠가 아이가 나를 앞서면, 조금 부끄럽겠지만, 그만큼 뿌듯하고 기쁜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논다. 가령, 아이가 밥을 남김없이 다 먹었을 때. 칭찬을 하긴 해야 하는데, 기왕 하는 칭찬을 영어로 해주는 것이다.



굿 잡!



그런데 이 칭찬이 어쩐지 심심한 것 같을 때, 아이를 좀 웃기고 싶을 땐, 이렇게 변형을 한다.



해님아, 잘했어. 굿 잡!
아니, 굿 짭짭짭!



짭짭거리는 엄마의 먹는 시늉을 보면, 해님이가 알아듣고 웃음을 터뜨린다. 본인도 "굿 짭짭짭" 하면서 낄낄거린다.



그냥 잘했을 땐 "굿 잡", 먹는 것을 잘했을 땐 "굿 짭짭짭"이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영어 하는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일 것이다. 뭐 어떤가. 내 맘대로 내 식대로다. 아이랑 하는 건, 뭘 하든 재밌기만 하면 장땡이다. 영어 못하는 엄마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왕 할 거라면, 우리에게 영어가 절대 근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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