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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연 May 08. 2020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집

1. 

"정우는 다 모르게 해줘." 딸들이 "네가 나를 이해해야지. 네가 아니면 누가 나를 이해해줘"라는 말을 들으며 모녀 관계에 단단히 옭아매져 질기고 억센 가족 내 감정노동에 휘말릴 때, 아들은 여성들의 희생을 통해 무지할 수 있는 권력을 대가 없이 승계받는다.


2. 

"절대 모를 수 없는 이야기"를 모르는, 자신을 향한 미움의 에너지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온 집안을 표표히 떠도는 그 모든 사랑과 증오의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그 구김살 없이 해사한 면상이 바로 권력의 얼굴이다. 


3.

가끔은 뜻도 없이 눈물이 나기도 했다. 너무 오래 헤매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4. 

이겨내기 어려웠을 것이 분명한 비참한 순간에 대해 기록하고는 바로 다음 단락에서 슈퍼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태연하게 스크류바를 먹는 장면을 적어넣는 식이었다. 본인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런 식의 구성이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그것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에게는 그런 아프고 폭력적인 순간들이 스크류바를 먹는 순간만큼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이었다는 느낌을 줬기 때문이다.


5.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


6. 

겨울은 사람의 숨이 눈으로 보이는 유일한 계절이니까.


7. 

우리의 소박함을 그런 식으로 정신 승리 하지는 말자. 그게 더 비참해


8. 

나는 매일 소설에 대해 생각하지만, 일 년 중 흐린 날의 비율로 소설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비가 오는 빈도로 소설이 써지며, 눈이 내리는 날만큼의 소설을 완성한다. 


9.

배아마저 아기의 형상으로 묘사하는 것은 지나치게 관습적인 재현이 아닌지, 그렇게 관습적으로 재현되는 음울함만이 임신중지와 연결되는 유일한 감정이어야 하는지.


10. 

기혼이라도 당혹감과 우울을 숨기지 못하는 산모들, 반대로 뜻밖의 유산에 안도감이나 위안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들을 우리는 많이 보아오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11. 

도덕은 그 자체로 선이 보증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사회, 역사적 조건이나 다수의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규범이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의심없이 존속될 수 있다. 따라서 도덕을 심문하지 않고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려한다면 필연적으로 기존의 관습과 규범에 적극적으로 영합하게 된다.


12. 

특정한 형태의 몸에 맞추어 설계된 세계가 어떤 종류의 몸을 장애화하는 것이다.


13. 

미국 남부에 위치한 마서스비니어드섬은 참고할만한 사례를 제공한다. 유전적으로 고립되었던 탓에 마서스비니어드섬의 청각장애 발생률은 타지역보다 월등히 높았지만, 거주민 중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의 공용어는 수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장애인이 아니었어요. 단지 듣지 못하는 사람이었지요."


14.

나는 그들에게 끝을 알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이런 디테일을 하나도 모른 채로 누군가와 결혼했으면 어쩔 뻔했나, 그 생각만 하면 그지없이 아찔했다.


15. 

즉물적인 남성들의 가치가 통용되는 낯선 도로 위에서, "세계에 홀로 내던져진 아이"가 되어버린 주연은 결국 또 엄마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한다. 출산과 육아의 문턱에서 번번이 친정 엄마를 찾는 여성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여전한 시스템의 미비와 책임의 편중이 중첩된 이 세계에서 육체와 감정 노동은 돌고 돌아 다시 여성의 몫이 되는 듯하다.


16. 

감동적인 연대를 가능케 했던 소설적 시공간에서 하차하는 순간, 주연이 느낀 친밀감과 고마움에도 불구하고 주연과 그녀 세대의 간극 혹은 격차는 여전할 것이고, 비혼 여성의 삶을 살아가는 주연에게 그녀들의 간섭과 편견은 여전히 일상을 파고들어 불편함과 거북함을 남길 것이다.


17. 

재현은 씹어뱉듯 외쳤다. 그때 그는 영재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분명해 보였다.


18.

모두가 자신의 세계를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기쁨을 느끼는 곳이 옳다.

옳다.

그것은 누구도 뺏을 수 없다.


19. 

늘 타자에 대한 시혜처럼 '우리'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던 '환대'는 이 집에 사는 '저들'의 몫으로 넘겨진다. 그 누가 자신을 환대의 대상으로 여겨보았을까?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이 예기치 않은 역전은 하나의 중요한 믿음을 깨부순다. 환대라는 시혜를 베풀어 포함할 것인지, 그렇지 않음으로써 배제해둘 것인지를 선택할 권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믿음을. 자신만이 중심이며 주체라는 믿음을. 


*모든 문장들은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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