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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쭉정이 Mar 25. 2023

30대, 결혼에 대한 남녀 '갑을관계' 결론

조건과 스펙만이 과연 평생 동반자의 자격일까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20대의 마지막, 사랑했던 사람과도 결국 이별을 한 뒤 인사이동을 겪으면서 나는 2년이 넘도록 사무실에만 박혀 있었다. 평소처럼 사람을 만나고 일을 했지만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은 내 눈엔 탁한 '회색'이었을 뿐 그 누구도 선명한 '무지개색'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감정이 무뎌진 채 30대를 보내고 있는 어느 날, 몇 년 전 같이 일했던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지금 누구를 만나고 있는데 보니까 자꾸 네가 생각이 나서. 너만 괜찮으면 점심에 셋이서 밥 한번 먹자. 너네 회사 앞으로 갈게.' 한 때 나와 친했던 선배였고 선배는 쉽게 이런 말을 하시는 분이 아니기에 선배를 믿는 맘에 한번 뵙기로 했다.



그렇게 남자 A를 만났다.

나보다 어린 나이였지만, 진중함과 어른스러움이 매력이었던 사람이었다. 코드가 맞았는지 어쨌는지, A로부터 연락이 왔고, 이후 둘이서 몇 번을 더 보았다. 만나는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A가 동생으로 보인 적이 없을 정도로 어른스럽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다.


리고, A는 고학력에 고스펙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A가 괜찮아 보였다. A의 말과 행동이 신뢰가 갔으며, A가 크게 느껴질수록 나는 작아져갔다.


그렇게 나는 '을'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연락을 기다리게 됐다. 그러나 A는 내가 바라는 만큼 연락이 없었고, 누가 봐도 A는 나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없었다. 관계를 정리해야겠다 싶어서 내가 먼저 말을 꺼내니, 그의 답은 '좋은 사람인 건 알겠지만, 편한 사이로 지내자'는 말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정리를 하니 그동안 왜 만났고 연락은 왜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깨달은 건 A는 직업적으로 나를 영업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열정이 가득했던 그는 나를 이용했을 뿐이었다.



며칠이 지났고, 감사하게도 이어서 또 소개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 사람은 지인의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사람으로, 구체적으로 뭐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한 번의 차임과 직장의 스트레스 등으로 불나방처럼 이사람 저사람 신명나게 만나보자 라는 심보였다.


그렇게 새로운 남자 B를 만났다.

일반 회사를 다니고, 연상이었으며, 호탕하고 솔직한 성격이 매력이었던 사람이다. B는 첫 만남부터 적극적이었다. 감사하게도 항상 먼저 연락이 왔고, 데이트 장소도 내 위주로 정했으며,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늘 관심을 가졌다.


그렇게 나는 '갑의 위치'에 있게 됐다. 

그러나 B는 고학력에 고스펙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B와 몇 번을 더 만나보면서 B의 일방적인 관심이 부담스러워졌고, 결국 그와도 관계를 정리했다.




깊게 고민해 봤다. A와 B를 모두 겪으면서 갑과 을의 위치를 모두 겪어본 나는 정말로 '고학력 고스펙'에 흔들렸던 걸까.

시간이 꽤 흐른 뒤에야 비로소 생각이 정리되었다. 결국 사람을 결정짓는 것은 '조건보다는 태도가 앞선다'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A에게 호감을 느낀  '고학력 고스펙'을 동경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A 말과 행동이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열심히 달리는 만큼 그 내면은 불안한 게 당연한 거겠지만 나 또한 불안이 많기 때문에 그러한 점은 맞지 않았다.


와 달리 B는 말과 행동에서 안정감이 느껴졌다. 고학력 고스펙은 아니었지만 대화를 하다 보면 결국 그의 말이 맞는 경우가 많았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안정적인 태도는 불안한 나를 꽤 긍정적이게 했다. 나에게는 A와 같은 사람보다는 B와 같은 사람과 더 잘 맞는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두 명 모두 잘 안 됐지만, 한 사람이 나에게 보여주었던 안정적인 태도로 인하여 조건보다 '태도가 앞선다'는 선명한 교훈을 알게 됐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내가 나에 대한 자존이 있으면 상대가 든 특별히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데,  존감이 낮아지면 별 볼 일 없는 상대도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내가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면, 좋은 사람 또한 자연히 보인다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나의 질한 소개팅 후기를 이렇게 공개하는 이유는,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조건'들이 있는 것 같다.

결정사에 가입하면 사람을 등급 매기듯, 드라마 '사랑의 이해'가 핫한 드라마가 되었듯,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는 보이지 않는 등급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굴하지 않고, 내가 스스로 내가 되어 나답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큰 강점이 되어 조건이나 등급 따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직접 경험해 봤기 때문에, 현실세계에서 정하는 조건 같은 것에 다시 한번 위축되고 싶지 않아서다.


내가 오롯이 나로서 산다면, 그것 만큼 매력적인 것이 있을까. 내가 나다워지는 것에 조금 더 솔직해진다면 그만큼 강해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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