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일하면서 지내다 보면 점점 자기 자신이흐릿해진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나름 열심히 살고자 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건 당연한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지나치게 흐릿해지기 시작하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점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잘 살고 있는 건지, 너무 한 곳에만 시야가 고여있는 것은 아닌지 객관적인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생긴 대로,본연의 개성대로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과연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내가 나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지 그다지 확신이 없었다. 일만 하다 보니 시야가 좁아진 것 같다. 답답한 마음에 나를 좀 더 알고 싶어 졌다. 그래야 나의 다음 단계는 무엇이고 어떠한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 떠나서, 그냥 쉬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서서히 여행 욕구가 올라왔고, 조용히 있고 싶으면서도 한국과는 단절된 곳으로 가고자 했다. 사실 바쁜 와중에 여행 일정을 세우고 비행기표에 숙소 등 예약하는 것이 부담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우리 회사 팀장님께서 '좋아하면 이 핑계 저 핑계 없이 이미 행동을 하고 있다.'라고말씀하셨다. 그 말에 나 또한 더 이상의 고민 없이 그냥 질러버렸다. 좋아하면 이미 행동하고 있다는 그 말은 곧 나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지는 알 수 있는 척도가 되기도했다.
이번 여행지는 일본의 교토로 선택했다. 조용하면서도, 오랫동안 산책하고 싶었다. 이렇게 또다시 혼자서의 여행이 시작됐다. 코로나 이후 첫 해외여행이다.
6/8 목요일 인천공항.
각자만의 개성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승무원, 각 나라별 외국인들, 화기애애한 가족단위의 모습, 또는 한편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참 안정적으로 보였는데, 그에 비해 나는 어딘가 불완전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은지, 결단력은 또 왜 이리 부족한지, 그냥 좀 더 가볍고 유연할 순 없었는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망설이다 놓친 것들이 꽤 많지 않았나 싶다. 일도, 사랑도. 또한 지나치게 고민하다 보니 그만큼 자신을 혹사시켜 온 것 같다. 뭐가 그리 두려웠을까. 이번 여행을 통해 나를 더 알게 되면 참 좋을 텐데.
교토에 도착하자마자 제주도 여행과는 확실히 다른 기분을 느꼈다. 사실 제주도 여행 정도의 느낌이겠지 했는데, 막상 오사카 공항에 도착하니 역시 해외는 해외였다. 모든 간판이 알아볼 수 없는 단어들로 쓰여 있을뿐더러 이 나라 사람들의 생김새, 언어, 말투, 옷, 심지어 나라 냄새까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낯선 모습이었다. 한국과는 (당연하지만) 너무나 달랐다.
그렇게 서울에서 벗어나 해외로 나오니, 그간 서울에 서는 생각에 짓눌려 있었음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렇게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래서 자꾸 도피처럼 여행을 가나보다. 마치 영혼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피곤함을 느낄 새도 없이 교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캐리어에 있는 모든 짐을 풀고서 핸드폰과 지갑만 들고 거리에 나왔다. 분명 몸은 피곤했음에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만큼 설레고 있었다. 그렇게 목적지 없이 숙소 근처를 산책했다. 일본만이 가지고 있는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에서나 보던 일본 교복을 입은 채 재잘재잘거리는 학생들, 퇴근하는 직장인들 모습, 소규모 선술집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 종종 보이는 외국 여행객들. 이 모든 것을 혼자서 맘껏 누릴 수 있는 시간들이 나를 벅차게 했다.
(기분이 좋아서 문이 열린 가게에 그냥 들어가 아사히 생맥주 1잔과 하이볼 1잔을 들이키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