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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하 May 22. 2016

악마를 보았다

곡성

 믿음을 시험당하는 일은 언제나 괴롭다. 그것도 신이 아닌 악마의 권능 아래 펼쳐지는 시험이라면 더욱 그렇다. 악마의 존재를 믿으면 악이 부활한다. 그런데 또 믿지 않으면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원인불명의 이유로 죽어 나간다. 그래서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의심의 끝은 확신이고 악마의 부활이다. 어쨌거나 인간은 파멸한다. 

 영화 내내 던져지는 미끼를 물고,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은 관객 입장에서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극 중 일광(황정민)이 훈도시를 입은 게 알고보니 악마와 한통속이었다는 암시였다더라. 무명(천우희)가 종구(곽도원)에게 돌을 던지는 장면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진다'는 모티프에서 나온 거라더라. 일광이 굿을 한 건 알고 보니 악마가 아닌 종구의 딸에게 살을 날린 것이라더라 등. 수많은 해석이 떠돌고, 그제서야 관객은 무릎을 탁 치며 영화를 볼 때와는 다른 쾌감을 느낀다. 왜 좀 더 의심하고 생각하지 못했을까라는 후회에서 비롯된 쾌감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과정마저 감독이 의도한 것이다. 이야기 내내 악마는 의심을 먹고 자라나며, 끝내 각성한다. 만약 영화를 보면서 외지인(쿠니무라 준)의 정체를 의심했다면, 그 나름대로 악마의 존재를 믿고 부활에 일조한 셈이다. 어쨌든 누군가는 동굴을 찾아온 부제처럼 악마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을 넘어 확신까지 할 것이므로, 무명을 의심했어도 다른 누군가의 선택으로 결과는 똑같다.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은 언제나 나약하다. 

 영화의 끝에서 감독은 그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종구는 일광의 전화를 받고 무명이 악마라는 말을 듣는다. 무명은 자신이 악마가 아니라 말한다. 그리고 닭이 세 번 울고 나서 집에 들어가면 가족을 구할 수 있다 선언한다. 그러나 종구는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 정황 상, 무명의 존재를 의심할 수 밖에 없다. 때마침 눈에 바닥에 떨어진 딸의 머리핀이 보이고, 무명이 죽은 동네 여자의 옷을 걸치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이 장면은 인간은 의심하는 것을 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의 형상화이다. 이전까지 일본인이 악마라 확신하던 종구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끝내 닭이 세 번을 울기 전에 집으로 뛰쳐 들어간다. 그리고 종구를 포함한 그의 가족은 몰살한다. 이 얼마나 허무한 결말인가. 과정이 어떻든 인간은 믿음으로 인해 파멸한다. 

 감독은 이 영화가 피해자에 관한 이야기라 말한 바 있다. 그리고 피해자가 왜 피해자여야 했는지가 중요한 문제이고, 피해를 당한 진짜 이유가 궁금했다고 덧붙였다. '그냥'이다. 십여년 전에 유행했던 빨간 마스크 괴담이 소름끼쳤던 이유는,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그냥' 입이 찢어진다는 공포감 때문이었다. 신의 자비로움에 이유가 없듯, 순수한 악에도 이유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영화 내에서, 인간은 이유 없이 흘러가는 거대한 서사 안에 믿음을 반복하다 잘못 디딘 발 하나로 나락에 떨어지는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믿는다. 

 혹자는 악마가 성경 구절을 언급하고, 성흔까지 보여준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이 영화가 종교를, 그리고 신성한 믿음을 모욕한다 비난한다. 그러나 정작 감독은 곡성을 통해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관객들을 전도한다. '당신들의 존재는 연약하며 보잘 것 없다. 그러니 살고 싶다면 믿지 말아야 것은 존재조차 의심하지 말라. 믿어야 할 것을 믿는다면 비참한 결말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관객은 끝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든, 멍한 표정으로 악마를 마주하며 전도당한다. 그리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은' 결과를 본 이의 '믿어야 할 것에 대한 믿음'은 더욱 굳건해진다. 

 생각해보면, 우리네 삶에 이유 없는 일이 벌어졌던 적이 있던가. 수많은 원인에서 결과가 파생하고 그 결과는 다시 또다른 원인이 된다. 현실에서 이유없는 결과는 만나기 힘들다. 그냥 벌어지는 일일지라도 인간은 받아들일 수 없는 서사의 구멍을 의심과 확증으로 채운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왔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반가웠던 이유는 이런 현실에 너무나도 명확히 '이유 없는 비극'이라는 직격탄을 던졌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이해해야 하는 삶 만큼이나 실체가 불분명한 일을 받아들이는 과정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어느 누구도 이 영화 안에서는 찝찝함과 불편함을 털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꽤 오랫동안 회자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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