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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쓴이 Mar 06. 2024

제목 없음

남에게 말하기는 곤란한 나만의 사정이 있다. 아니 나만의 마음이 있다. 이 마음은 좀 비굴하고 구김이 있고, 또 모순적이라서 좀처럼 어딘가 꺼내보이기 힘들다. 뚜껑을 여는 순간 속수무책으로 터져 나와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 모른다.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갖고 살까? 그랬으면 좋겠다.


아프고 쓰린 것들은 일상생활을 열심히 하면 열심히 할수록 잊힌다. 회사를 내가 정한 시간에 맞춰 출근하고, 체크리스트를 열심히 지워가며 일을 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밥을 지어먹고… 그리고 산책하고 밤에는 TV를 보다가 잠을 자는 생활에 열중할수록, 그래. 서서히 뒤로 밀리며 잊힌다. 


그러나 출근길에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에 떠올랐다. TV에서 뭘 볼지 채널을 돌리는 와중에 떠올랐고, PC 모니터를 보고 있으면 이따금 눈앞에 보이고, 귀로 들리는 듯했다. 가장 먼저는 목소리가 그다음엔 표정이, 그리고 그다음엔 내가 서서히 순차적으로. 그렇게 떠오른 장면은 이어달리기를 한다, 그다음 장면으로. 또 과거의 다음 장면으로.


그런 장면들은 ‘자, 이제부터다’ 하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물처럼 스며들었다. 틈새만 있으면 어디든 스며드는 물처럼 나를 적셨다. 나는 열심히 일하다가 소매 끝이 젖은 걸 알아채고, 어떤 날은 화장실에 가다가 양말이 젖은 걸 알아채고, 또 어떤 날은 책을 읽다가. 또 어떤 날은. 그렇게.


나는 이 것들을 ‘제목 없음’으로 하기로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름을 붙이거나 깊게 골몰하는 순간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될 것 같아서. 또는 너무 성급하게 결정을 내버릴 것 같아서. 내용은 가득한데 제목은 없는 걸로 내버려 둔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다 지나간다. 그게 나를 위하는 유일한 방법이란 걸 안다.






“마음 쓰는 일은 어렵죠. 균형을 두는 일도요.” 솔아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다 지나가요.” 주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희의 마음 안에서는 여전히 지나가지 않고 있다고 말하지 못했지만. 솔아와 이야기하며 처음으로 주희의 일을 멀리서 보게 된 것 같았다. 솔아의 거리감을 빌려서. 지나간다. / 167p 이무기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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