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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쓴이 Mar 07. 2024

흑백

정확히 둘로 나뉘지 않는단 걸 알면서도.

첫 회사에서 그녀는 재인을 만났다. 재인은 매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회의 때마다 눈알을 굴리며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정처 없이 눈알을 굴림과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펜도 책상 위로 도르르. 굴렸다.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다시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촬영 때면 여러 번을 불러야 대답했다. 촬영장에서 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재인을 찾았고, 재인씨, 재인씨. 재인씨!!! 하고 세 번을 불러야만 했다. 또 재인은 행사에 필요한 것들을 자주 빼놓고 왔다. “아 맞다”가 재인의 단골 멘트였다. 어딘가 모르게 번진 다홍색 립스틱이 발린 입술은 늘 벌어져 있었다. 재인은 원래 A팀에서 일했는데, A팀의 팀장이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며 그녀의 팀으로 보냈다. 트러블 한번 없이 회사에 다니던 그녀에게 재인을 맡아보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그녀와 일한 지 몇 주가 되지 않아 재인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재인은 서럽게 울었다. 두 손으로 티셔츠의 목부분을 눈까지 끌어와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말했다. “죄송해요. 저도 계속 다니고 싶은데, 제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이렇게 급하게 그만둬야 해서 아쉬워요.” 그녀는 재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당장 모레부터 출근할 수 없다는 재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무슨 사정이냐고 묻는 말에는 입을 꾸욱 다물기만 해서.


재인이 퇴사 후 남기고 간 노트에는 가지각색 욕설과 회사 사람들에 대한 조롱이 쓰여 있었다. 그녀는 그 노트를 덮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날 오후, 화장실에서 양치하며 카카오톡을 스크롤하던 중 발견했다.


재인의 상태메시지 ‘급 퇴사 후 여행 중✈’ 그녀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두 번째 회사에서 그녀는 소명을 만났다. 소명은 가끔 웃으며 위험한 대사를 내뱉곤 했다. ‘말’이 아니라 ‘대사’라 칭한 이유는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여서다. “망하면요? 자살하면 되죠” 소명은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너무나도 간단하게 ‘죽으면 되죠’도 아니고 ‘자살하면 되죠’라고 말했다. 그 대사를 뱉는 소명에게는 스치는 두려움도 없었고, 이런 말을 해도 되나?라는 망설임도 없었다. 소명은 마치 자신을 누군가 찍고 있는 듯, 이 장면을 연출하는 감독이 된 듯 그런 말을 내뱉었다. "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나는 알아." 하는 표정으로. 소명이 감독이었던 그 장면에서 그녀는, 소명이 원하는 반응을 보여줬다. 그 뒤로도 소명은 그 대사를 아주 자주 던졌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그 말을 듣고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게 되었다. 그 뒤로 소명의 그 대사도 멈췄다.


세 번째 회사에서는 자기 경력을 속인 채 팀장으로 입사한 승주도 만났다. 어느 날 인사팀 팀장이 얼굴이 붉어진 채 승주에게 다가왔다. 종이 한 장을 내밀더니 모든 짐을 빼고 오늘 2시 전까지 나가세요. 했다. 승주의 얼굴은 인사팀 팀장보다 더 벌게져 있었다. 찍소리도 내지 않고 짐을 챙겨 사무실 밖으로 달아났다. 며칠간은 승주에 대한 소문이 회사 파티션 위를 넘나들었다. 그것도 거짓이더라, 저것도 거짓이더라 , 어쩐지 중요한 미팅이 잡히면 급하게 연차를 쓰더라... 몇 달 뒤, 승주는 새로운 회사로 취직했음을 암시하는 글을 인스타그램에 게시했다. 사원증 사진과 함께였다.


재인, 소명, 승주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비슷한 태도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개인적으로 연락할만한 친분도 아니었고, 명분도 없었지만 문득 그 셋이 궁금해졌다. 그녀에게 재인은 회사에서 가장 즐겁게 수다를 떨 수 있는 편한 동료이기도 했고, 소명은 그녀에게 위로를 잘 건네던 살가운 동료이기도 했다. 승주는 접점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야근하고 있던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고 고생한다고 어깨를 두드려주던 동료였다.


과거를 되짚어보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한 사람들을 추리면 언제나 그 세 사람이 남았다. 그리고 기분이 묘했다. 오리무중이었다. ‘해당하는 답을 모두 고르시오’(답이 몇 갠 지는 안알랴줌)라는 무책임한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 하는 기분이었다. 좋은 사람인가/나쁜 사람인가, 이로운 사람인가/해로운 사람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어떻게 되는 걸까.  


세상은 흑과 백으로 나누어지기보다는 흑과 백을 모두 가진, 교집합인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지만 수많은 교집합 중에서도 확실한 정답을 골라내야 하는 세상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정답을 골라내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그런 문제들의 정답란을 대부분 비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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