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적>을 보고
길게 늘어선 기찻길 위에는 가장 느린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높은 다리 위 하늘과 가까워진 만큼 땅에서도 멀어져 있었지만, 그날의 바람이 익숙한 듯 그들은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 어떤 위대한 모험을 하는 것도 아니며, 목숨을 걸만큼 절박한 상황에 놓인 것도 아니었다. 단지 평범한 일상을 보내기 위해 그들은 그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그 안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는 사람 냄새 가득한 한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 어귀의 방 안에서 편지를 쓰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준경(박정민 분)은 청와대를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담아 써내라고 있었다. 서툰 글솜씨로 꾹꾹 눌러 담은 진심은 벌써 54번째가 되었다. 물론 대답은 '아직' 없었다. 다만, 마을에 기차역을 만들겠다는 다짐만은 굳세게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에는 누나 보경(이수경 분)이 있다. 동생 바보인 누나는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며 언제나 동생을 챙겨주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소년의 앞에는 기관사인 아버지 태윤(이성민 분)이 있다. 낮은 의자에서 무거운 공기 아래, 한숨 대신 흩날리는 담배연기로 빈 방을 채워낸다. 태윤은 뒤를 보지 않는다. 준경 또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흔한 무뚝뚝한 아버지와 사춘기 소년의 모습이라기엔 둘 사이가 딱 기찻길만큼 멀어 보였다.
그런 소년은 어떤 소녀를 만난다. 라희(임윤아 분)는 준경과 같은 반이다. 그녀는 준경의 퉁명스러운 표정 뒤에 감춰진 빛나는 무언가를 보았다.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불탈 뿐이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무언가를 본 것이다. 라희는 자신의 시선에서 준경이 모양을 갖추기를 원했다. 스스로 '뮤즈'가 되기를 원하는 그녀는 적극적으로 준경을 돕는다. 서로 맞잡은 두 손만큼 서로의 마음도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동시에 다가오는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다.
파스텔톤으로 꾸며진 80년대의 작은 마을일 뿐이었다. 길목에 놓인 빨간 우체통으로 실어 보내는 준경의 목소리는 매번 닿지 않고, 폴라로이드로 찍은 순간은 흐릿하게나마 간신히 한 순간만을 담아낸다. 구식 안테나 텔레비전은 자꾸만 말썽 피우기 일쑤이며, VHS로 보는 10대 청춘들이 꿈꾸는 세계는 아직 낯설기만 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서툴지만 그리운 향기로 마을 사람들을 한 데 모은다. 서로 마음을 나누고 등을 맞대고 함께 땀을 흘리며 만들어가는 옛 풍경 속에서 기적을 작게나마 꿈꿔본다.
한 발짝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철로에 신호등을 만들고, 역 설치에 대한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하고, 준경 또한 자신의 능력에 빛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순탄하게 흘러갈 것만 같았다. 이야기는 다시 개인으로 초점을 맞춘다.
마을 안에는 결국 사람이 있었다. 개인으로 초점을 맞추자 영화는 다시 '인간의 이야기'가 된다. 실수하고 망설이고 후회한다. 여전히 준경은 아버지 태윤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태윤 또한 그렇다. 담배 연기를 연거푸 뿜어내며 서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준경이었다.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에도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 다른 반찬을 집어먹는다. 합이 맞는다기 보단, 단지 서로를 피하듯 젓가락질을 할 뿐이었다.
너무나도 소중하면 조심스러운 법이다. 망설임과 수줍음 그 사이 어딘가에서 그들의 관계가 그려진다. 마음이 향한다고 하여 쉽게 바라보지만은 못한다. 간신히 뻗어내는 목소리에서조차 제대로 단어들을 꺼내지 못하고, 서로의 거리만 확인하게 된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다. 어느 단위로 표현할 수 없는 유일한 수치일 것이다. 그렇기에 마음의 거리를 조절하는 것은 어렵다. 자신이 다가간 만큼 상대가 오지 않는다면 다시 마음의 거리가 멀어질 것이다. 준경과 태윤은 이 과정을 수백 번도 더 거친 듯했다. 때문에 멀어진 마음의 거리가 그들 사이에서 굳게 벽을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곁눈으로, 실눈으로 애써 못 본 척하면서도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린 그들이었다.
우리는 흔히 기적을 바랄 때 하늘을 바라본다. 자신의 믿음이 향하는 곳을 향해 간절한 마음을 보내곤 한다. 마치 준경이 보낸 편지처럼. 하지만 결국 영화는 하늘의 뜻보단 사람의 힘을 믿고 응원하게 만든다. 이야기 초반 위험한 기찻길을 함께 나아갔던 그 모습 그대로 서로의 손을 붙잡고 계속 나아간다. 기적이 언제나 커다란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마치 사람의 온기로 채워내기엔 충분한 세상에서 제일 작은 기차역처럼 누군가에겐 '겨우'라는 수식어로 불릴 뿐이지만, 누군가에겐 가장 염원했던 커다란 선물이 될 것이었다.
기적은 그렇게 찾아왔다. 결국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떤 운명적인 시련이나, 하늘만이 해줄 수 있는 천운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기적 또한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따스한 말 한마디를 하고 손을 내밀어 함께 향한 길의 끝엔 기적이라 불릴만한 소중한 것들이 놓여 있기 마련이다. 영화는 파스텔톤으로 그려내 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작은 기차역으로 매듭짓는다. 아무렇게나 묶은 모양이 아닌 이쁜 리본 모양으로 그리움과 감동을 가득 담아 이야기는 끝이 난다.
다시 마을에 가차의 기적소리가 울려 퍼진다. 사람들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 낸 작은 기차역엔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것이었다. 다가오는 기차를 보며 환하게 웃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자신들이 이루어낸 기적 사이에서 또 다른 기적을 꿈꾸며 그들은 나아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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