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울> 스포일러 리뷰
코로나다 자격증 공부다 해서 밖에도 나가지 않고 살고 있는 요즘, 이러다 정말 죽겠다 싶어서 간만에 눈에 들어온 영화를 보러 갔다. <인사이드 아웃>의 제작진이라는 것에도 혹했고, 예고편의 그림체나 대사가 따뜻한 느낌이라 '힐링이나 좀 할 수 있을까'하고 선택했던 영화였는데 생각보다도 훨씬 좋은 영화였다. 역시 삶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죽음만한 소재가 없나보다. 사실 굳이 해석할 필요도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영화지만, 영화의 내용을 스스로도 좀 돌아보고,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들을 기록해서 오래오래 남기고 싶어 리뷰를 쓰기로 결심했다.
주의! 이하의 내용은 영화 <소울>의 직·간접적인 스포일러가 다량 포함되어 있으니 순수하게 영화를 즐기고 싶은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누르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글은 정답이 아닌 어디까지나 개인의 감상과 해석이며, 다른 해석과 감상 역시 존중합니다.
<소울>의 간단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무명 재즈 뮤지션인 조 가드너가 꿈에 그리던 공연을 앞두고 사고를 당해 영혼이 '태어나기 이전'의 세계로 가버린다. 그곳에서 지구에서 정말 태어나기 싫어하는 영혼인 22번의 멘토가 되고,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22번과 여러 사건들을 겪는다는 이야기. 원래는 더 자세히 적었는데 왠지 작품에 실례가 될 것 같아 다 날렸다.
꿈과 열정, 삶의 목표를 이야기하는 영화는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그 속에서 주인공들은 꿈을 이루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사는 삶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렇게 사는 삶을 동경하게 된다. 다른 모든 일들-월세와 관리비를 낸다거나, 고용의 불안정에 흔들린다거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같은 일들-은 내가 바라던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보면 꿈이 이루어지면서 갑자기 해결되어버린다니, 얼마나 낭만적이고 행복한 상상인가. 대부분의 작품들이 이 '판타지'를 어떻게 하면 더 현실적이면서도 멋지게 그려낼까를 꿈꾸는 반면, <소울>은 이러한 '판타지'는 없다고 말한다.
주인공인 조 가드너는 재즈를 사랑하고 실제로 실력도 좋지만, 초등학교 밴드부의 기간제 담당 교사로 일하며 살아간다. 의상실을 하는 어머니에게는 그저 철없는 아들일 뿐이고, 그렇다고 밴드부의 아이들이 가르칠 맛이 나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조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라고 생각하고, 오로지 멋진 재즈 밴드에 들어가서 '뮤지션'으로서 살아가는 것만이 자신에게 의미 있는 삶이라고 여긴다.
우연한 기회에 선망하던 뮤지션과 함께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자, 조는 엄청나게 기뻐하다가 맨홀에 빠져 영혼의 세계로 가게 된다. 이 때의 연출이 재미있는데, 벽돌이 떨어지는 공사 현장, 바나나가 깔린 과일가게 앞과 못이 흩뿌려진 철물점, 차가 쌩쌩 달리는 횡단보도를 기적처럼 무사히 지난 후에야 맨홀에 빠지게 된다. 얼핏보면 그저 만화적인 연출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작품의 의미를 잘 담은 훌륭한 장면이었다.
조의 영혼은 '위대한 너머(great beyond)'라고 불리는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가 '위대한 이전(great before)'으로 되돌아가게 되는데, 이곳은 지구에 태어나는 영혼들이 성격과 열정(불꽃)을 발견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아직 태어나기 전의 영혼을 '제리'라는 관리자들과 함께 지구에서 훌륭한 일을 해냈던 영혼들이 '멘토'라는 이름으로 짝을 지어 다른 영혼을 돌보게 된다. 조는 살아남기 위해 멘토인 척을 하게 되고, 거기서 지구에 태어나기 정말 싫어하는 22번 영혼의 짝이 된다. 태어나야 할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는 22번과 얼른 자신의 몸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조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게 되고, 22번이 지구로 가는 티켓을 완성하면 그걸 조가 양도받는 조건으로 함께 움직이게 된다.
여기서 22번은 이미 수많은 멘토를 경험한 것으로 나온다. 링컨, 간디, 엘리자베스 등등 말 그대로 '위인'들과 함께 이야기해봤음에도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 22번의 모습을 보면 어렸을 적 위인전을 읽었던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위대하고 훌륭한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어쩌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느낌은 나 역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고, 아마 이런 경험이 한 번씩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지도 않았던 롤모델을 적어보라거나, 장래희망이니 진로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22번은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데, 이것도 이 영화의 독특한 점이었던 것 같다. 이건 좀 너무한가? 싶을만큼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위인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통쾌한 느낌도 있었다. 누구나 위인이 될 수는 없다. 우사인 볼트를 보여주면서 '너도 노력하면 저렇게 뛸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들을 풍자하는 뉘앙스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조를 자신의 몸으로 되돌리려다가 우연히 22번의 영혼이 조의 몸 속, 조의 영혼은 고양이의 몸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이발사와 조의 엄마를 만난다. 이 과정에서 조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처음 소개한 연출에서 그랬듯 조는 오직 '재즈'에 대해서만 몰입하고 주변을 둘러보지 않는 삶을 살았다. 자신의 몸에 들어간 22번이 그들과 진솔하게, 재즈 이외의 주제로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조는 재즈에만 몰두했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소울>이 특별해지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는 꿈이라고 부르고, 또 누군가는 성공이라고 부르는, 모두가 긍정적으로만 그려내는 그것이 과연 우리의 삶에서 진짜로 중요한 부분인가? 하는 것이다. 작품은 이 주제를 여러 장면으로 변주해가며 보여준다. 한 가지에 집착해서 괴물처럼 되어버린 '길 잃은 영혼'의 모습이나, 삶의 의미같은 것을 '유치하다'고 말하는 제리의 말, 마침내 꿈에 그리던 공연을 끝내고 '이제 뭘 하죠?'라는 물음에 '내일도 똑같이 공연해야지'라고 답하는 도로테아 윌리엄스를 허무하게 쳐다보는 조의 표정같은 장면들. 이런 장면들이 '삶의 원동력으로서의 꿈'이 아닌, '꿈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삶'을 사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을 뜨끔하게 하고 있지 않나.
이런 주제는 이와 반대로 삶 그자체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22번의 모습을 통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22번이 가장 원했던 것은 피자의 냄새와 맛, 지하철 환풍구에서 나오는 바람과 늦은 오후 햇살을 뚫고 팽글팽글 돌며 떨어지는 단풍나무 씨앗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러니 22번이 훌륭한 멘토 수십명을 보고도 살고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이유도 이쯤에서는 이해가 된다. 누가봐도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 얻는 교훈은 결국 '삶' 그 자체보다는 그사람들이 삶을 통해 이루어낸 '업적'과 '성공'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히려 22번이 주목했던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던 조, 음악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코니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인류 역사에 손꼽을 정도로 훌륭한 위인들을 만나봤던 22번이 오히려 이들의 감정을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는 점은 또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꿈과 성공을 위해 매 삶,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은 물론 좋다. 그러나 그 끝에는 실패하는 순간, 좌절하게 되는 순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삶에는 꿈과 성공 말고도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는데, 꿈과 성공만이 '가치있는 것'이 되는 순간, 다른 모든 것들은 조가 그랬듯 '무의미'하게 되어버린다. 그러나 꿈을 이루고 성공을 한다 해도 여전히 관리비는 내야하고, 분리수거날은 찾아온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처럼 수많은 사소한 일상들이 기다리고 있다. 삶의 목표가 '꿈'으로 정해지는 순간, 우리의 삶은 성공과 실패의 둘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그 두 개의 선택지에서 벗어나게 되면, 우리의 삶은 작고 반짝이는 수많은 일상이 가득한 밤하늘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