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테넷> 스포일러 리뷰
크리스토퍼 놀란의 최신 개봉작 <테넷>을 보고 왔다. 유료 시사회에서 먼저 보고 온 사람들의 말로는 엔트로피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보아야 이해가 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들려와서 미리 검색을 해봤는데, 뼛속까지 문돌이인 나에게 그런 개념이 이해될 리가 없었다. 그리고 막상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생각해보면 그런 개념들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그렇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홍보 문구에 사용되었던,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라는 말이 더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문돌이가 1회차만에 이해한 <테넷>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주의! 이하의 내용은 영화 <테넷>과 <어벤저스> 시리즈의 직·간접적인 스포일러가 다량 포함되어 있으니 순수하게 영화를 즐기고 싶은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누르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글은 정답이 아닌 어디까지나 개인의 감상과 해석이며, 다른 해석과 감상 역시 존중합니다.
테넷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말하면, 특수부대인 주인공(Protagonist)은 테러를 막으러 갔다가 우연히 테넷이라는 집단에 가입하게 된다. 이 집단의 목적은 다름 아닌 현재의 인류를 모두 없애고자 하는 미래 세력의 음모를 저지하는 것이다. 인버스(inverse)라는 능력을 이용해 물건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로도 돌아갈 수 있는 적들을 물리치고 현재의 사람들을 지키려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테넷의 독특한 점은 제목에도 있듯이 여러 가지 장르가 섞여있다는 점이다. 미래의 어떤 세력이 현재의 인류를 없애려는 방식은 앞에서 말한 인버스를 이용한 것인데, 어떤 물건이나 사람의 시간을 돌리는 것 아닌 세상 전체의 시간을 인버스해서 모든 생명을 다시 무로 돌리려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플루토늄 241을 이용한 물질화된 알고리즘인데, 이 알고리즘이 한 자리에 모두 모인 후 미래로 정보가 전달되면 그것을 이용해 미래에서 과거 전체를 인버스할 수 있게 된다는 설정이다. 이 알고리즘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 주인공은 알고리즘 탈취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다. 이런 부분들은 도둑들이나 오션스 시리즈와 같은 하이스트(Heist) 무비의 냄새가 난다. 전반적으로는 시간을 되돌린다는 주제도 그렇고 비주얼적으로도 훌륭한 SF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는 거대한 스케일의 폭발과 총격전이 이어지며 전쟁 영화의 느낌이 살짝 들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장르들의 특성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느낌이다. 그렇기에 어떤 장르라고 명확하게 말하기에는 모호하다. 물론 거기에는 나의 모자란 식견도 한몫하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느낌이다.
테넷에서 또다시 주목할 점은 모호함이다. 일단 주인공부터가 그렇다. 우리는 주인공의 이름도 모르고, 정확한 직업이나 배경도 모른 채로 무작정 주인공을 따라가야 한다. 인물의 설명이 거의 없다시피 한 이 작품은 그렇기에 어떤 부분들은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주인공의 선택도 그렇고, 비현실적인 상황에도 매우 덤덤한 모습도 그렇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반동세력, 사토르와 미래 세력은 어떨까? 사토르도 무기 밀매를 한다는 것과 가족 관계 몇몇을 제외하면 거의 드러난 것이 없고, 미래 세력은 거기에 더해 목적과 인버스를 제외하면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지, 어떤 존재들인지, 하물며 사토르에게 어떤 지원을 어떻게 해주는 지도 거의 밝혀지지 않는다. 또 동료인 닐과의 관계나 주인공의 세력과 사토르의 세력은 대체 어떻게 그렇게 큰 스케일의 작전을 척척 이끌어내는지에 대해서도 영화 내에서는 거의 밝혀진 바가 없다. 영화의 이런 모호함을 놀란이 의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야기들을 좀 더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테넷은 시간여행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시각적인 측면은 물론이고, 영화 내의 여러 관계들과 장면들에서도 끊임없이 이러한 점을 강조한다. 등장인물들은 과거의 자신(혹은 미래의 자신)과 싸우기도 하고, 과거의 자신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닐과 주인공의 경우는 더욱 복잡한데, 현재의 주인공을 마주하고 있는 닐은 과거에 미래의 주인공에게 선택된 사람이다. 그러니까 어린 닐이 미래의 주인공과 만나고 시간이 흘러 현재의 주인공을 도우러 온 셈이다. 이렇게 과거와 미래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테넷에서 과거는 끝나버린 역사가 아니다. 미래 역시 완전히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에 영향을 준다. 그렇게 완성되는 것이 현재인 것이다. 양 끝에서 출발해 가운데로 수렴하는 모양의 이름인 테넷(TENET)이라는 이름이나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모양의 손깍지도, 끼워 맞춰보자면 어느 정도는 이 쪽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테넷의 명대사 중 하나를 꼽자면 '일어난 것은 일어난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정도로 해석해볼 수 있다. 하나는 조금 복잡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다른 세계관의 '시간'의 개념과 테넷 세계관의 '시간'의 개념이 다르게 적용한다는 방향이다. 예를 들면 '어벤저스'의 시간의 개념을 보자. '어벤저스'의 경우 시간을 되돌아가면 그 순간 2개의 우주가 생긴다. 하나는 시간이 되돌아온 세계, 하나는 그렇지 않은 세계다. 어떻게 보면 분기의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경우, 미래에서 과거에 영향을 미치면 그것에 따라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다. 반면 테넷에서는 과거와 현재, 또는 미래와 현재가 유동적으로 얽히게 되지만,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와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조차 미래가 되기 위한 필연이다. 어벤저스의 시간관에 비해 테넷의 시간관은 닫혀있고, 이것이 심화되면 운명론에 가까운 것이다. 이 경우, '일어난 것은 일어난 것이다'라는 말은 그러한 운명론적인 성격을 부각하게 되겠다.
그러나 닐의 마지막 대사 중 '운명이라기보다는 현실'이라고 칭하는 대사로 인해 이 해석은 다소 의미를 잃게 된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모든 것이 결정되어있는 세계'라는 것이 결코 유쾌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조금 다르게 해석해보기로 했다. 이전의 설명이 더욱 복잡한 방향으로 해석했던 것이라면, 이번의 설명은 더욱 단순한 방향으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일어난 것은 일어난 일이다.'라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시간'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다. 과거가 어떻고 미래가 어떻고 하는 식으로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일어난 것은 일어난 것,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생각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해석이 마음에 드는 게, 그것이 뭔가 작품 전체적인 맥락에 더 부합한다는 느낌이다. '운명이라기보다는 현실'이라는 말에도 어느 정도 적용할 수 있고, '미래 세력'이라는 존재들의 목적도 결국 당대의 실패를 '과거를 바꾸는 것으로'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테넷에는 과거를 바꾸려는 여러 시도가 등장하지만, 그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한다. 반대로 그게 과거든 미래든 상관없이 주인공들은 그저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로 좋은 미래를 얻어냈다. 이렇게 해석하면 닐이나 캣의 행동도 좀 더 설명할 수 있다. 주인공과의 마지막 대화로 닐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라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닐은 과거로 떠났다. 캣의 경우도 비슷하다. 사실 캣이 처한 상황은 어느 쪽에서나 다르지 않다. 오히려 미래의 캣이 처한 상황이 더욱 자유롭지 못하다. 사토르에게 아들의 목숨을 저당 잡혀 죽는 미래와 비교하면, 인류 전체가 소멸하는 미래는 캣에게 있어 최소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최악인 미래다. 캣 역시도 몇 번이나 '미래를 위해' 사토르를 죽이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끝내 신호를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사토르를 죽인 후 바다로 떠나고, 과거의 캣은 그런 자신을 보며 자유로워 보인다고 부러워한다. 이전의 캣이었다면, 과연 어떤 상황이었던들 '사토르를 죽인다'라는 대담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아들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자신이 과거에 했던 실수'로 인한 일이라는 생각에, 그리고 그 이후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상 때문에 쉽사리 어떤 일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캣의 눈에는 늘 절망이 보였던 것이다.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혀, 현재에 어떤 일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모호함의 문제로 돌아가서, 주인공이라는 캐릭터를 이토록 모호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 주인공이라는 존재가 인류를 상징하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우선 익명이라는 점에서 이 인물은 어떤 상징적인 존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름이 지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 인물을 상황에 따라서 관객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좀 더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또 지나치게 담담한 듯한 성격도 인류가 가진 적응력, 또는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비약도 끼워 맞추기도 지나치고 궤변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겠지만, 억지로 읽으면 이런 식으로도 읽을 수 있겠구나, 하고 읽어주시기 바란다.
미래 세력이 바꾸고자 했던 과거의 일들로 언급되는 것이 크게 두 가지다. 환경파괴와 핵무기. 특히 핵무기에 대한 언급은 굉장히 자주 언급된다. 핵무기를 만들었던 과학자들이 첫 원폭실험 이후 스스로를 개새끼(sons of bitches)라고 했던 일은 굉장히 유명한 일화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기후변화나 환경파괴에 대한 일들도 수많은 사람들이 경고하고, 되돌리고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두 가지 모두 어떻게 보면 '인류 전체의 실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실수로 인한 폭주를 막는 인물이 바로 '테넷'이라는 점이 앞에서 말했던 '테넷 인류설'을 뒷받침한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이 이야기는 작은 이야기가 아니라 매우 큰 스케일의 이야기고, 그렇기에 작은 서사를 말할 시간도 틈도 없이 이 이야기가 이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숨 쉴 틈도 없고 인물들의 자잘한 이야기도 들을 수가 없었던 점이 단점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전체적인 스케일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느낌도 든다.
열역학도 엔트로피도, 영화를 보는 내내 거의 몰랐지만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동시에 같은 사람이 두 명이나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도, 영화 내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영화가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알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인셉션과 인터스텔라에서 여러 이론들을 그토록 자세하게 설명했던 놀란이, 이번에는 설명하는 것을 깜빡했다는 것이 가능할까? 실제로도, 그런 것들을 하나도 모른다고 한들 영화의 해석에 전혀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껴라'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돌아 돌아 결론을 말하자면, 테넷은 '최선을 다해 지금을 살아라'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결말도 다소 어정쩡한 느낌이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결말 이후도 결국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주인공은 현재에 최선을 다해 미래 세력의 음모를 저지하고 캣과 아들을 비롯한 현재의 사람들을 구해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또 그 이후의 사람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렇게 미래에 다가올 환경 문제라던가 핵무기와 관련된 것도, 결국은 지금 최선을 다하다 보면 새로운 방향이 보일지도 모른다. 다가올 미래에 지레 겁먹지도 말고, 바꿀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지도 말고 현재를 살아라. 조금 엉성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게 내가 테넷을 보고 내린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