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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Sep 06. 2021

꾸준함도 재능이란다

재능이 없다고 좌절하는 너에게

엄마는 어려서부터 작가가 되기를 꿈꿔왔어. 초등학교 때부터 글짓기 대회에 나가는 걸 좋아했고 거기서 상을 받아 내 글이 실린 수상집을 받아  날에는 학교에서 집까지 20분 거리를 단숨에 달려올 만큼 기뻤지. 중학교 2학년 때였나. 학교에서 작품전시회 행사가 있었는데, 엄마는 거기에 내려고 직접 쓴 글을 모아 책을 한 권 만들었어. 집에 프린트기가 없어서 친구네 집에서 눈치를 보며 한 장 한 장 출력해 양면테이프로 고정하고 '씨앗'이라는 제목을 붙여 가격표까지 당당하게 써넣은 그 책은 지금까지도 엄마 책장 한편을 차지하고 있단다. 내용이 너무 오글거려서 함부로 열어보지는 못하지만.



고등학교를 지나며 독서량도 퍽 줄었고 글을 쓸 일도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는 늘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나 봐. 고3 여름, 모두가 수능 공부에 매진하던 어느 야자시간에 엄마는 단편소설을 쓰고 있었거든. 소설 공모전에 출품해 문예창작학과에 특별전형으로 입학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었어. 그 가을 수상의 꿈과 함께 문예창작학과의 꿈도 좌절되었고 엄마는 뒤늦게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다시 수능 공부에 전념해야 했지.


결국 엄마가 선택한 진로는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어. 직장에서 쓰는 글이라고는 정해진 형식에 숫자만 바꿔 넣는 보고서가 전부지.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작가를 꿈꿔. 매일 단 몇 페이지라도 책을 읽고 단 몇 줄이라도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어. 글 쓰는 게 재미있거든.


가끔 엄마는 작가라는 꿈 앞에서 의기소침해지는데, 주로 다른 작가들의 글을 읽을 때 그래. 서점에 진열된 책들을 면 짧은 문장 몇으로도 시선을 붙드는 작가들이 정말 많은 거야. 글을 쓰려고 띄운 이 브런치라는 공간에서도 제목에 끌려 다른 이들의 글을 먼저 읽다 보면 어쩜 이런 생각을 해내는지, 이 상황을 어떻게 이런 문장으로 풀어냈는지 감탄할 때가 많아. 그들의 재능을 부러워하는 마음 한편에서는 내게 작가로서의 재능이 부족한 것 같다는 의심과 좌절감이 뾰족 고개를 들지.


엄마의 시선을 빼앗은 작가들 중에 '이석원'이라는 분이 있어. 음악인으로도 알려졌지만 지금은 글 쓰는 일에만 몰두하는 그의 작품 중에는 1년여간 베스트셀러 코너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은 책도 있지. 엄마는 그의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하나같이 밤늦게 밀려오는 졸음을 쫓으면서도 책장을 덮지 못할 만큼 재미있었어. 우연히 들른 그의 블로그를 구독 설정해두고 짧은 일기글까지도 모조리 정독할 정도야.

그가 작년 겨울 오랜만에 산문집을 한 권 냈어. 그런데 거기에 너무나도 뜻밖의 내용이 있는 거야.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지만 그에게는 분명히 진심인듯한 그것은 바로, 그 또한 언제까지 글을 쓸 수 있을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었어. 사람들이 더 이상 그의 글을 봐주지 않는 날이 올까 봐 불안해하고 있다는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니고 책과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조차 익히 아는 베스트셀러의 저자인 그가 말이야.

그런 좌절과 두려움을 딛고 그는 또 한 권의 책을 펴냈고 엄마는 덕분에 한 가지를 배웠어. 물갈퀴를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사실은 앞으로 나가려고 두발을 열심히 젓고 있다는 걸.


재능이 없음에 좌절한다는 건 재능을 갈구한다는 걸 테고, 그건 곧 재능을 갈구할 만큼 애정을 가진 일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것만으로도 축복이 아닐까? 세상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거든. 시간에 을 맡기고 그저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지다고 봐.

이석원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다룬 대목 뒤에는 '한 사람이 얼마나 노력을 하는가조차 타고난 디엔에이의 소관일 확률이 높다'는 문장이 이어져. 재능이 고정값이라고만 생각했던 엄마에게는 꽤 희망적인 말이었어. 내게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문장으로 사람들을 매료할 재능은 없더라도 한 가지 일에 꾸준히 근성을 발휘하는 재능 면에서는 뒤처지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믿어보려고. 그건 앞으로 살아가면서 천천히 증명해 보이면 되는 재능이니까.

엄마의 DNA를 물려받았으니 너도 너 자신을 믿어봐.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더라도 지치지 않고 한 걸음씩 쌓아 가다 보면, 언젠가 평범한 우리에게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성취가 따라주지 않을까.


재능은 우리가 선택해서 얻는 것이 아니지만, 누구나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재능 못지않게 소중한 선물이 있어. 엄마는 그게 '재미'라고 생각해. 어린 너는 그림 그리는 걸 재미있어 한단다. 아직은 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그림이지만, 빈 종이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 행위 자체를 너는 재미있어하지. 너는 음정도 가사도 틀리지만 노래 부르는 걸 재미있어하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것도 좋아해. 모두 무얼 위해서가 아니라 너 스스로 재미있어서 하는 것들이야. 성취와 보상이 없이도 너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들이지.

어른이 된 너도 네가 좋아해서 시작한 그 일을 내내 재미있어하면 좋겠다. 비록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말이야. 네게 심리적인 것 이상의 보상을 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일으킬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건 덤이라고 생각하자. 넌 이미 네 삶에 재미를 더하는 한 가지 일을 가졌고 재능이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거기서 시작된 거잖아.

네게 기쁨을 주는 것이 원래 그 일의 목적이었던 거야. 재능이 뛰어나 돈도 벌고 인기도 얻었는데 그러다 어느 순간 처음 네게 있었던 재미를 잃게 된다면 그게 더 슬픈 일이지 않을까?


엄마에게는 글쓰기가 그런 일이야.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바쁜 삶에서도 시간 내 컴퓨터 앞에 앉고 싶게 만드는 재미있는 일. 그래서 계속 써보려고 해. 설사 꾸준히 시간과 노력을 들인 후에도 기대하는 결과가 따라주지 않으면  어쩌겠어.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여정이 즐거웠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그렇게 생각해야지.






세상에 천재는 많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과의 비교나 위로가 아니라 삶에는 천재가 없다는 사실뿐이다.


- 이석원 '2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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