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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Sep 12. 2021

의식하지 말고 당당하게

편견과 싸우는 너에게

'공문서에 편견이 내포된 표현을 지양'하라는 공지가 사내게시판에 뜬 날 오후, 엄마는 차를 몰고 어느 기업체로 출장을 갔어. 입구를 들어서는데 머리가 희끗하신 대표님이 인사도 하기 전에 먼저 묻는 거야.

"혼자 오셨어요?"

혼자라는 대답을 듣고도 못 믿겠다는 듯 엄마 등 뒤를 한번 더 살피시고는 정말로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자리를 안내하시더라. 수십 년 사업을 해온 대표님께는 여자인 엄마가 혼자 차를 몰고 출장을 나와 대표님과 등한 위치에서 업무를 본다는 것이 의아하셨던 거야. 엄마가 직장에 다닌지도 벌써 10년이 지났고, 전부터도 이미 수많은 여자 선배들이 사회에 나와 남자 선배들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도 말이야. 편견이란 공문서에 쓰는 단어 몇 개를 바꾼다고 쉽게 없어지는 건 아닌 거지.


네 아빠가 경험한 편견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까? 엄마가 널 낳고 1년간 육아휴직을 한 후에 네 아빠가 바통을 이어받아 육아휴직을 했었어.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널 두고 직장으로 돌아온 엄마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지. 엄마가 육아휴직을 할 때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네 아빠가 육아휴직을 한다고 하자 다들 그럴싸한 설명을 기대하는 눈치였어.

네 아빠는 기저귀 갈이대가 없는 남자화장실에서 기저귀를 가는 것보다 어린이집 학부모 모임에 참석했다가 "어머, 아빠가 오셨네요. 대단하시다!"라는 말을 듣는 걸 더 불편해했어. 여느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하는 것과 같이 옷을 입히고 먹이고 놀아줄 뿐인데 마치 특별한 능력이라도 발휘한 것처럼 치켜세우는 태도도 부담스러워했지.


여자라면 이럴 것이고, 남자라면 저럴 것이라는 편견은 어디서 오는 걸까? 사람들은 왜 겪어보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 섣불리 판단하지?

이런 편견을 두고 한 교수님이 '인간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두뇌가 진화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설명한 글을 읽었어(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시사IN).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내게 유해한 지 무해한 지를 빨리 판단해야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니, 즉각적인 판단을 위해 지금까지 축적된 수많은 경험과 정보를 활용한다는 거야.

흑인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영화에서 본 흑인들이 대부분 힘이 셌으니 저 사람도 분명 그럴 거야, 생각하거나, 내가 알던 일곱 살 여자애들은 다들 분홍색을 좋아했으니 얘도 분명 파란색보다는 분홍색을 좋아할 거야, 라고 단정하는 거야.


너는 자의로, 혹은 뜻하지 않게 주류의 영역 밖에 있을 수 있어. 어떤 영역에서는 주류에 속하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아닐 수도 있고. 너와 상관없는 태그가 단지 네가 그 집단에 속해있다는 이유로 너를 따라다니기도 할 거야. 그 태그가 불편하거나 혹은 불쾌할 수도 있어.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편견에 맞서는 대신 피하는 방법을 택하지.

엄마의 지인 중에는 벌써 몇 년 전에 이혼한 사실을 숨기고 지내는 사람이 있어. 장애가 있는데 장애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써 몸의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통계적으로 드러난 성소수자의 비율보다 내 주변의 성소수자 비율이 현저히 낮은 것도 사회적인 편견이 빚어낸 결과라고 생각해.


하지만 편견이라는 것이 과거에 축적된 경험과 정보로부터 만들어진다면, 편견을 피하고자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사는 건 편견을 더 굳건히 하는 결과로 이어지겠지.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치면서 자신만 힘들어질 테고.

그렇다면 우리는 편견에 어떻게 맞서야 할까?

답은 간단해. 편견을 의식하지 않고 나 자신으로 당당하게 사는 거야. 남들이 규정한 틀에 갇히지 않고 내 본연의 모습대로 사는 거지.

이전의 경험들로 편견을 가진 상대방에게 새로운 경험을 더해주는 거야. 여자인 엄마를 자신과 대등한 관계에서 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대표님께는 빈틈없는 업무로, 아빠의 육아가 어설플 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엄마들 못지않게 잘 해내는 것으로 당당하게 보여주는 거야. 상대방 잘못짚었다는 걸.

물론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시간이 지난 후에도 바뀐다고 장담할 수 없지. 네가 상대방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엎은 후에도 상대방은 이번이 한 번의 예외일 뿐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어. 하지만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너를 위해서, 당당해지라고 말하고 싶어. 사람들이 좁은 시야에 갇혀있다고 너까지 틀에 갇힐 필요는 없잖아.


엄마가 즐겨본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주인공 '동백'은 사람들의 편견을 과감하게 뒤집은 인물이야. 고아이며 미혼모이자 술집을 운영하는 동백을 두고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리지. 극 중 연쇄살인마인 '까불이'가 동백을 해치려고 한 이유도 술집이나 운영하며 혼자서 애를 키우는 고아 출신 동백이 자신을 동정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지. 하지만 동백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부끄러워하거나 주눅 들지 않고 떳떳하게 행동해. 까불이가 위협할 때마다 스스로를 구해내는 것도 동백 자신이고.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고 봐. 자신을 향한 편견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삶을 헤쳐나가는 모습이 모두에게 통쾌한 즐거움을 준 것이 아닐까? 드라마에서 동백은 그녀를 무시하는 마을 사람들보다 훨씬 사려 깊고 멋져 보였거든.


누군가 너를 편견으로 대한다는 건 적어도 그들보다는 네가 이해하고 경험하는 세계가 더 넓다는 거야. 그러니 너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세상이 더 넓고 다양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우리가 보여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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