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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Sep 23. 2021

고통이 마음까지 집어삼키지 않도록

병마와 싸우는 너에게

지난 5월 갑작스레 암진단을 받은 네 외할아버지는 25회에 걸쳐 항암치료를 받고 며칠 전 수술대에 오르셨어.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지만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가기까지는 시간이 꽤 필요할 것 같아. 암세포의 위치가 안 좋아 몸의 다른 기능을 부득이 손상시켜야 하는 수술이었거든. 회복하실 때까지 외할아버지는 지금까지 앓았던 고통보다 더 큰 불편을 견디셔야 할 것 같구나.


코로나19 때문에 환자 외 1인으로 출입이 제한된 병원에는 네 이모가 머물며 간병 중이야. 몸이 무거운 엄마는 병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이모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듣고 있어. 병실 선택을 두고 고민을 했는데 입원 수속이 끝나고 네 이모에게 연락이 왔어.

"언니, 고민할 상황도 아니었어. 남은 게 6인실 뿐이야. 심지어 여기도 자리가 몇 개 없어."
대형병원의 그 많은 병실을 가득 채울 만큼 아픈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엄마는 조금 놀랐어.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도 모두 일상의 단절을 경험하고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겠구나 생각하니 동질감도 들었고.

게다가 같은 병을 앓는 병실 환자들의 절반은 엄마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거야. 지난 몇 달간 암환자 카페에서 본 2,30대 환자들이 떠올랐어. 아직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꿈에 쉼표를 찍고 절망하고, 두려워하고, 그럼에도 용기내고, 회복에 대한 의지를 다지던 그들이 병실에도 함께 있었던 거야.


가족인 엄마의 마음에도 먹구름이 잔뜩인데, 아픔을 겪는 당사자는 오죽할까.

이제껏 열심히 살아온 게 전부인데, 조금만 더 가면 원하던 목표에 닿을 수 있었는데,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병마에 억울하고 야속할 거야.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내게, 왜 하필 지금 이런 시련이 닥쳤을까 하늘을 원망하겠지.


다시 건강하던 때로 돌아가야지, 하다가도 치료과정이 힘겨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할  같아. 수술 후 네 외할아버지는 병상 위에서 꼼짝도 않으려고 하셨대. 많이 걷고 숨쉬기 운동이라도 해야 회복에 도움이 되는데 한 발자국도 떼기가 버거우셨던 거야. 수술로 암세포는 덜어냈지만, 그 대가로 얻은 몸의 불편과 회복하는 과정이 더없이 막막하게 느껴지셨나 봐.

그걸 알면서도 엄마는 외할아버지께 병상에서 얼른 나오시라는 말을 수밖에 없었어. 일어나 한 발자국이라도 떼시라고, 건물 밖으로 나가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먼저 수술한 사람들이 회복하는 모습을 보시라고.

몸의 고통이 마음까지 집어삼킬까 봐 두려웠거든. 


얼마가 될지 모르는 투병생활을 견뎌내려면 마음을 지켜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 물론 엄마도 알지. 몸이 아프면 마음도 덩달아 힘들어진다는 걸. 몸과 마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까.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마음을 돌봐야 한다고 봐. 힘든 상황에서도 어렵게 지킨 마음의 건강은 지난한 투병생활을 온몸으로 버티게 해 줄 가장 든든한 아군이 되어줄 테니까.

그래서 치료 중에도 마음을 즐겁게 하는 일들을 찾아서 시도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있어. 바빠서 시기를 놓친 영화를 보거나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거나 배우고 싶었던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는 것 같은 일들. 많은 제약이 따르겠지만 이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거야. 마음에게 몸의 고통과 불편으로부터 잠시나마 한눈팔 여유를 줘보는 거지.


어려서는 질병이나 사고가 특별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거라고 생각했어. 나이가 들수록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 아픔은 누구에게나, 아무 인과관계없이도 온다는 걸.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것이 내게 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억울하겠지만,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자연사로 사망할 확률이 고작 5% 내외라고 해. 바꾸어 말하면 100명 중 적어도 95명은 일생에 최소 한번 이상 죽을 만큼의 아픔을 경험한다는 거야. 아픔은 가만히 서 있다가 돌에 맞는 낮은 확률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마주하게 되는 삶의 한 과정인 거지.

언제든 올 수 있는 것이 지금 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더 억울한 기분이 들지도 모르지만, 아픔을 완전한 불행이 아니라 인생의 쉼표 정도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남들보다 일찍 아픔이 찾아왔다는 건, 회복하고 털어내기에 남들보다 더 유리한 지점에 있는 것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잖아.


어제는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마지막회를 봤어. 불의의 사고로 의식을 잃고 긴 시간 병원에서 살던 젊은 환자가 드디어 퇴원을 하더라. 퇴원 전 그녀는 어눌한 발음으로나마 의사들에게 직접 작별인사를 건네고, 옆을 지켜준 엄마에게는 고맙고 미안하다고 문자메시지도 보냈어. 음료수 뚜껑도 열지 못하던 딸이 보낸 문자메시지에 화장실에 숨어 소리 죽여 우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는 덩달아 눈물이 어.

현실에 드라마와 같은 전개를 기대하는 건 무리겠지만, 드라마 속에서 마주하는 이야기들이 현실에도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해. 현실을 인정하고 다시 여기서부터 차근차근 걸어 나갈 계획을 세우다 보면 드라마 속 결말이 언젠가는 우리의 결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픈 것이 불행이 아니라, 아프지 않은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며 살자.

뜻하지 않은 병마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리더라도, 여태 불편하지 않았던 날들을 감사히 여기며 다시 그 감사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힘을 내자. 현실은 16부작으로 끝나는 드라마가 아니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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