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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Apr 12. 2024

용수의 인식론

용수의 인식론


중론中論을 중심으로


용수龍樹(나가르주나 Nagarjuna, 150?-250?)의 산스크리트 이름 ‘나가르주나’의 ‘나가’는 인도 신화에서 말하는 나가(Naga)로써 큰 뱀, 즉 '용龍'으로 한역되었고, ‘아르주나’는 '마하바라타'(인도 고대의 장대한 규모의 대서사시)에서 뛰어난 영웅의 이름이다. 용수는 석가모니 입멸 후 600년이 흐른 뒤 나타나 그때까지의 불교 사상을 재구조화하여 대승불교를 확립시킴으로써 제2의 부처로 칭송되며 심지어 용수 보살(실존 인물을 보살로 부르는 경우는 무착, 세친, 마명 그리고 용수 4명뿐이다.)로 불린다.


용수가 쓴 중론(산스크리트어: Madhyamaka-śāstra 마드야마카 사스트라)은 449구의 간결한 게송이지만 매우 복잡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용수의 중론에서 ‘걷는 행위’를 통해 ‘불래불거不來不去’를 증명하는데 여기서 용수의 논증이 매우 재미있는 한편 그의 인식론을 엿볼 수 있다.


중론 관거래품觀去來品 제2에서 걷는 행위의 과거, 현재, 미래의 고찰을 통해 ‘불래불거不來不去’를 논증해 낸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문답 형식이지만 내용만 요약)


걷는 행위의 과거·현재·미래 고찰(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이다.)


용수는 일단 결론부터 말한다. 즉 “걷는 행위는 과거·현재·미래 어디에서도 성립하지 않는다.” 와 ‘걷는 행위’는 곧 ‘걷는 운동’을 말하고 있으며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에서 성립하지만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을 걷는 일은 없다.”라고 전제한다.


-       논증의 시작 혹은 전제


가정 1: 걷는 자는 걷지 않는다. 걷는 행위의 시작은 과거·현재·미래 어디에서도 성립하지 않는다. 

가정 2: 걷는 자는 멈춰 서지 않는다. 

가정 3: 걷는 행위의 정지는 과거·현재·미래 어디에서도 성립하지 않는다. 

가정 4: 걷는 자와 걷는 행위는 동일한 것도 별개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성립하지 않는다. 

결론: 걷는 행위, 걷는 자, 걷는 대상은 성립하지 않는다.


-       구체적 논증


'누군가가 걸어간다'라는 문장을 분석할 때, 걷고 있는 장소는 그 사람이 이미 통과한 지점이든가, 아직 통과하고 있지 않은 지점이든가,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이겠지만, 


(1) '이미 통과한 지점을 지금 걷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 '아직 통과하지 않은 지점을 지금 걷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오류다. 있을 수 없다. 

(3) ‘이미 통과한 지점’과 ‘아직 통과하지 않은 지점’과는 다른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을 지금 걷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통과하고 있는 주체와 걷는 주체가 다르게 되는 것으로 논리적으로 오류다. 


용수는 말한다.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에 어떻게 걷는 행위가 동시에 속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은 걷는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 현재를 통과하고 있는 지점은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매우 난해해졌다. 다시 설명하자면,


걷는 행위는 운동을 하는 곳에 있다. 그리고 운동은 이미 통과한 지점이나 아직 통과하고 있지 않은 지점이 아니라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에서 하기 때문에 걷는 행위는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을 지금 걷고 있다는 말이 된다.


용수는 이어서 설명한다. “걷는 행위가 속하기 이전에, 즉 걷는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은 결코 있을 수 없다.”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이란 말속에는 반드시 걷는 행위가 수반되어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위 복잡한 설명은 이것을 논증하려는 의도이다.  


한편,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에 걷는 행위가 속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걷는 행위가 속하기 이전에는 걷는 행위 없이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이 있게 되어 버린다.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을 지금 걷고 있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에 걷는 행위가 속한다고 가정한다면 여기에는 두 가지 걷는 행위가 있게 되어 버린다. 


(1) 그곳이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이라고 불리는 근거가 되는 걷는 행위와 다른 한편으로 

(2) 그 지점에 현재 하고 있는 ‘걷는 행위’이다.


‘걷는 행위’가 두 가지 있게 되면 ‘걷는 자’가 두 명이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걷는 자’ 없이 ‘걷는 행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 '걷는 자가 걷는다'는 것은 없다. 중첩에 의한 오류다.

(2) '걷지 않는 자가 걷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3) ‘걷는 자’와 ‘걷지 않는 자’ 혹은 또 다른 제삼자가 걷는다'는 것이 가능한가?


'걷는 자가 걷는다'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걷는 행위 없이 걷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걷는 자가 걷는다'라고 주장하게 되면 ‘걷는 자’에게 ‘걷는 행위’를 귀속시키는 것으로써 이 말은 곧 ‘걷는 행위’ 없어도 ‘걷는 자’가 있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더불어 '걷는 자가 걷는다'라고 가정하면 두 가지 걷는 행위가 있게 되어 버린다. 


(1) 그 사람이 '걷는 자'라고 명시되는 근거가 되는 ‘걷는 행위’와 

(2) 현재 ‘걷는 자’로 존재하는 사람의 ‘걷는 행위’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1) 이미 통과한 지점에서 ‘걷기 시작’하는 일은 없다.

(2) 아직 통과하지 않은 지점에서 걷기 시작하는 더더욱 없다. 

(3)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에서 걷기 시작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걷기 시작하는 것인가? 어디에서도 걷기 시작할 수 없다.


용수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걷는 행위’를 시작하기 전에는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도 이미 통과한 지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존재한다면 거기에서 걷기 시작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직 통과하지 않은 지점에서 어떻게 걷기 시작할 수 있는가?


‘걷는 행위’의 시작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이미 통과한 지점,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 아직 통과하지 않은 지점은 각각 어떤 것으로 상정되는가?


(1) '걷는 자가 멈추어 선다'는 것은 없다. 

(2) '걷지 않는 자가 멈추어 선다'는 것도 없다. 

(3) ‘걷는 자’와 ‘걷지 않는 자’와 또 다른 어떤 제삼자가 멈추어 선다'는 것도 없다.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에도, 이미 통과한 지점에도 아직 통과하지 않은 지점에도 걷는 자가 멈추어 서는 일은 없다. ‘걷는 행위’와 ‘걷는 자’가 완전히 같다는 것은 오류다. ‘걷는 행위’와 ‘걷는 자’가 완전히 같다고 가정하면 원래 ‘행위자’와 ‘행위’가 동일하다는 뜻이 되어 버린다. 다른 한편으로 ‘걷는 자’가 ‘걷는 행위’와 전혀 다르다'는 것도 역시 오류다. ‘걷는 자’가 ‘걷는 행위’와 전혀 다르다고 상정한다면 ‘걷는 자’가 없어도 ‘걷는 행위’가 가능하게 될 것이고 ‘걷는 행위’가 없어도 ‘걷는 자’가 있을 수 있다는 오류에 빠진다.


만일 두 가지가 동일하다고 해도, 별개의 다른 것이라고 해도 성립하지 않는다면 그 두 가지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성립하겠는가? 따라서 결코 성립할 수 없다. 어떤 ‘걷는 행위’에 의해 ‘걷는 자’가 명시되는 경우, 그 ‘걷는 행위’는 그 사람이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확실히 누군가가 어딘가로 걸어가는 것이지만 ‘걷는 행위’ 이전에 ‘걷는 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걷는 행위’에 의해 ‘걷는 자’가 명시되는 경우, 그것과는 다른 ‘걷는 행위’를 그 사람이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걷는 자’에게 동시에 두 가지 걷는 행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 존재하는 ‘걷는 자’가 과거·현재·미래에서 '존재, 비 존재, 존재이면서 비 존재'인 세 종류의 ‘걷는 행위’를 하는 일은 없다. 

(2) 존재하지 않는 ‘걷는 자’도 세 종류의 걷는 행위를 하는 일은 없다. 

(3)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걷는 자’가 세 종류의 걷는 행위를 하는 일은 없다. 


용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즉, ‘걷는 행위’, ‘걷는 자’, ‘걷는 대상’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법은 가는 일도 오는 일도 없다.


문득 고대 그리스 엘레아의 제논이 말한 역설이 떠 오른다. 아킬레우스와 거북, 화살의 역설이 생각난다. 비슷하지만 또 다른 문제이다.


참고문헌

『중론』 용수 지음, 가츠라 소류, 고시마 기요타카 편역, 배경아 역, 불광출판사. 2016. 

『중론』 용수 지음, 구마라습 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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