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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l 02. 2024

엄경근 그림 이야기

욕망과 의지의 표상

1.     행성


알려진 바에 의하면 태양계를 벗어나 지구와 가장 가까운 행성으로 프록시마 센타우리(센타우루스자리)라는 행성이 있다. 지구로부터 약 4.244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데 최근 관측에 따르면 지구와 유사한 환경으로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행성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술력, 이를테면 우주선의 속도가 문제인데 지금 태양계를 벗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보이저 2호의 최고속도는 15Km/sec인데 이것을 기준으로 하면 앞서 이야기한 4.224 광년의 거리를 지나 그 행성에 도착하려면 약 97000년 정도가 걸리는 영원의 거리에 있다. 


그 영원의 거리에 존재하는 행성처럼 우리의 이상과 현실 너머 존재하는 아름다운 행성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바로 엄경근 화백의 행성이다. 엄경근의 행성에는 언제나 엄경근이 있다. 실체의 엄경근이 가지고 있을 모든 의지의 총화인 엄경근이 그 행성에 있다. 


엄경근의 꿈은 이미 그에게 의지가 되었고 그 의지는 저 작은 행성에서 다시 꿈이 된다. 그 꿈의 뿌리는 놀랍게도 ‘결핍’과 ‘고뇌’ 일지도 모른다. 결핍은 본질적으로 해소가 어렵다. 결핍은 충족되는 순간 새로운 결핍이 생겨난다. 엄경근이 작업한 모든 작품에서 그 결핍의 꿈은 충족과 생성을 반복한다.


고뇌는 직관의 산물은 아니다. 고뇌는 시간의 껍질 속 그 비좁은 틈 속에서 자라 마침내 공간을 지배한다. 저 작은 행성에 서 있는 전봇대는 고뇌의 표상이다. 전봇대 중간쯤에 달린 가로등은 고뇌 속에서도 잠깐씩 보이는 희망과 안도의 불빛 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계단을 올라 집에 도착한 엄경근은 다시 새로운 결핍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어느 순간 엄경근은 그 의지, 그리고 꿈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 무중력으로 떠 있는 저 행성이 꿈과 의지로부터 조금씩 떨어져 있는 작가의 심상일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관조가 시작된다. 의지에서 조금 거리가 떨어진 관조는 지나간 일을 더욱 생생하게 하기도 하고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알 수 없는 기억을 떠 올리게 하기도 한다. 


언제나 과거는 객관들뿐이다. 처절했던 주관의 조각들은 시간에 의해 연소되어 재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현재는 오로지 빛나는 객관의 행성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2.     숲 사이로


의지의 세계에서 의지가 희미해지면 오로지 표상만 남게 된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 권기철 옮김, 2020. 257쪽) 엄경근의 의지는 본래 그의 꿈이었다. 의지가 행성에서 다시 꿈으로 희미해지면서 이제는 표상으로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행성의 숲은 작가의 의지이자 꿈이며 표상인 셈이다. 따라서 숲은 작가의 내밀한 순수가 저장된 공간이며 그 순수의 본질은 행성 뒤로 끝없이 펼쳐진 은하수일 것이다. 


행성을 덮는 저 숲 사이에 있는 계단은 두 번 꺾인다. 삶의 고비마다 늘 새로운 희망은 있고 그 희망이 다해갈 무렵 우리는 또 새로운 전환점에 서게 된다. 잊지 못할 사람이나 감동도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지고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지점도 시간 속에서는 언제나 과정이 되고 만다. 엄경근의 작품에서 저 계단은 언제나 그런 복잡함을 품고 있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 작가 중 야콥 반 뤼이스달(1629~1682)이라는 화가가 있다. 풍경화가였던 그는 그의 작품 속에서 의도적으로 지평선을 화면의 맨 밑까지 끌어내린다. 그리고 그 위 공간을 구름이나 하늘로 가득 채운다. 이전의 네덜란드 그림에서 느끼던 삶의 소소한 풍경에서 벗어나 압도적인 하늘을 묘사한 뤼이스달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미미한 우리의 삶을 느끼곤 한다. 


그런가 하면 엄경근은 지극히 소소한 장면을 통해 우리를 설득한다. 계단과 집, 그리고 전봇대와 가로등, 숲과 행성의 반사면은 지극히 사소하다. 하지만 단지 사소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소함에서 내밀한 결핍과 고뇌, 그리고 나아가 명징한 슬픔과 따뜻한 희망까지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뤼이스달이 추구했던 압도적인 하늘과 엄경근의 사소한 행성은 우리의 의지 속에서 각각의 표상으로 서로에게 넌지시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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