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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달 Oct 25. 2022

탈락 후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탈락상대성이론의 법칙 

나는 취업준비생이다. 그것도 나이가 많은 취업 준비생이다. 가고 싶은 회사가 있어서 올해 대학원도 휴학하고 일년 간 준비해왔다. 일년 동안 공백기를 갖는 다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대학원 때 이 회사 면접을 두 번이나 가서 떨어졌고, 대학원이랑 취업준비는 병행 할 수 없었다고 느꼈다. 그래도 필기 합격을 한 경험이 있으니 휴학하고 제대로 준비하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했다. 무엇보다 이 회사에서 주최한 공모전에서 나는 올해 2등을 하기도 했다. 모든 게 딱딱 내 계획대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나는 내가 가고 싶은 회사에 내년 1월 1일부터 근무하면 될터였다. 


예상치 못한 전형에서 떨어졌다. 이번에 이 회사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고 자기소개서 대신 AI면접과 온라인 평가를 봤다. 물론 작년에도 AI면접을 봤고, 합격했지만 이상하게 올해 만큼은 합불이 확실히 예상되지 않았다. 안정적으로 통과해 온 서류라는 전형이 없어서 였던 것 같다. 슬프게도 내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필기도 아니고, 면접도 아니고 나는 시작도 전에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을 위해 일년을 투자해왔는데, 다른 경험까지 고려하면 나는 7년이나 준비해온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내 실력을 발휘해 볼 새도 없이 떨어져버린 것이다. 


수많은 탈락에도 끄떡없는 내가 컴퓨터 화면을 앞에 두고 울었다. 내가 간절히 원하고, 내가 간절히 노력해도 이뤄지지 않는 것이 있구나 이 세상에는. 내가 간절히 원하고, 간절히 노력해도 이뤄지지 않는다면, 나는 이 세상에 어떤 기대를 안고 살아가야할까? 지금까지 내가 계획대로 이뤄낸 것은 내 노력과 소망이 이뤄진 것이라기 보다는 그저 '운이 좋아서'였구나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내 힘으로 통제되지 않는 인생에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세우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나갈 수 있을까. 


집에 있으면 분명 우울함의 늪의 빠질 것이었다. 나는 집에서 나왔다. 신촌에 있는 한 카페를 가기로 했다. 버스를 탈 힘도 없던 나는 집에서 신촌까지 걷고 또 걸었다. 날씨는 쓸데 없이 좋아서 나는 도로의 자동차와 버스의 시끄러운 소리 뒤에 숨어 엉엉 울으면서 걸어 나갔다. 이때 만큼 마스크가 고마웠던 적이 없다. 나는 얼굴을 마스크속에서 일그리며 더 크게 울었다. 앞으로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야할까. 나는 오늘부터 뭘 하며 보내야할까. 이렇게 하염없이 걷고 걷기만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걷고 걸어서 지구 한 바퀴라도 돌면서 시간을 흘러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구 한 바퀴 돌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걸으며 계속 시간을 봤고. 시간은 기이할 정도로 고되게 흘렀다. 나는 체감상 삼십분 정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시계를 보면 고작 8분밖에 지나있지 않았다. 시간을 아낀다고 버스를 타고 다니고 발빠르게 걸어도 모자라는 게 시간이었는데, 시간은 야속하게도 더디게 흘렀다. 겨우겨우 한시간 반이나 걸어 카페에 도착해서 나는 신문을 꺼내 읽었다. 이제는 딱히 시간을 쓸 곳이 없어지고, 빨리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은 나는 신문을 한 자 한 자 집중하며 느리고 느리게 읽었다. 오늘치 신문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하지만 더 느리고 꼼꼼히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은 겨우 한 시간 밖에 지나있지 않았다. 평소 나는 신문읽기에 보통 두 시간이 걸린다. 심지어 후루룩 살펴보는 정도였는데 말이다. 


밥만 먹어도 오후가 되고 저녁이 되는 날들과 달리. 오늘은 걷고 또 걷고. 신문도 읽고. 친구한테 전화해 울기도 울고. 홍제천에 떠 다니는 오리를 보면서 '아무생각 없는 오리가 부럽다. 오리로 태어났어야 해'하며 자책의 시간을 보내고. 그럼에도 시간이 가지 않아 글을 썼는데 아직도 오후 네 시이다. 왜 시간이 필요할 때는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흐르고, 이렇게 시간이 아무 쓸모 없어진 지금은 이토록 더디게 흐르며 지옥 같은 시간을 주는 것일까. 평소에는 잠을 채우느라 모자랐던 밤의 시간도 오늘은 길고 길겠지. 시간은 빠르게 흘러도 고통스럽지만, 이토록 느리게 흘러도 고통스럽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이 강한 곳에서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는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하늘에 계신 아인슈타인씨. 탈락 후의 시간은 왜 느리게 흐르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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