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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호 Jun 01. 2020

베트남에서 가장 ‘한국적인 곳’인 곳은 바로 극장이다

축구만 했다 하면 도시 전역에 한국인 감독의 사진이 걸려있는 나라, 한국 예능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방송이 끝나자 마자 바로 자국의 동영상 사이트에 올려서 시청하는 나라. 그리고 즐비한 도시 빌딩 두어개당 하나씩 베트남 음식점이 자리잡고 있는 나라, 지난 한 해에만 400만명 넘게 베트남을 방문했던 나라. 


이 모든 풍경은 2020년을 살고 있는 한국인과 베트남인에게 너무나도 익숙하다. 베트남은 아세안 국가 중에서 한국과 가장 긴밀한 교류를 나누고 있는 나라다. 양국은 서로가 매우 중요한 무역파트너이다. 또 투자유치와 시장확대라는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나라다. 베트남과 한국은 그렇게 정서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동반자’의 길을 걷고 있다.


양국의 교류가 증가함에 따라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을 찾아보는 건 쉬운 일이 되었다. 현재 베트남에는 삼성전자 제조공장 4곳이 들어서 있다. 베트남의 GDP 28%를 삼성전자가 차지할 만큼 중요한 경제 축이다. 삼성전자 이외에도 LG전자, 포스코, 효성 등의 기업들이 베트남에 제조공장을 세우며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관광차 베트남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베트남에 다수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다’는 것을 체감하기란 쉽지 않다. 삼성 같은 기업의 제조공장은 관광지와 벗어나 있기에 관광객들은 홍보간판이나 대리점 상호를 통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기업들이라면 다르다. 관광객들이 오가는 주요 지역에서 이 기업의 로고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로 CGV와 롯데시네마다.



베트남 사람도 영화를 보려면 CGV나 롯데시네마를 가야 한다


당신이 베트남 호치민 번화가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고 해보자. 그곳에는 베트남어 자막이 달린 한국 영화 혹은 한국영화를 리메이크한 베트남 영화가 한두편 쯤은 걸려있을 것이다. 당신이 낯익은 티켓부스에서 표를 사는 동안 당신의 일행은 스낵코너 앞에서 갓 튀긴 허니팝콘과 콜라 콤보를 주문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당신은 ‘베트남 극장에 와 있다’는 생각을 잠시 잊을 것이다. 베트남의 극장은 너무나도 한국적인 공간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베트남 극장 상당수가 한국 회사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극장 시장 1위 주자인 CGV가 전체의 44%를, 2위인 롯데시네마가 19.2% 가량을 점유하고 있다. 베트남 극장 세곳 중 두곳이 한국 업체라는 이야기다. 당신이 호치민이나 하노이 시내에서 극장을 찾는다면 보통 CGV나 롯데시네마 중 한곳이다.


CGV와 롯데시네마는 각각 2011년, 2008년에 베트남 영화시장에 뛰어들었다. CGV는 후발주자였지만 현지 1위 멀티플렉스 업체였던 ‘메가스타’를 인수하면서 단숨에 1위로 등극했다. CGV베트남은 지난해 기준으로 29개 도시에 78개 극장, 457개 스크린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에만 극장 8개, 스크린 47개를 늘렸다. 2위 롯데시네마는 지난해 기준 44개관 199개 스크린을 운영하고 있다.


CGV와 롯데시네마 두 회사의 매출 성장세도 폭발적이다. CGV는 작년 3분기까지 매출 1442억원, 영업이익 177억을 달성했다. 전년 동기대비 매출은 35%, 영업이익은 208% 늘었다. 가히 폭발적인 성장세다. 롯데시네마의 성적도 준수하다. 아직 영업이익을 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작년 3분기까지의 매출은 전년 동기대비 37.4% 늘어난 488억을 기록했다.


중요한 점은 베트남 영화시장이 이제 막 문을 열어젖힌 상태며 그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NH투자증권 이화정 애널리스트는 “베트남은 중위 연령 30세로 젊은 인구구조를 보유하고 있으며 인당GDP 성장률이 매우 높아 엔터 및 레저 산업에 대한 수요 상승 여지가 높다”고 설명했다. 베트남의 1인당 연간 영화관람 횟수는 0.5회로 한국(4.2회)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다. 소득이 늘어나게 될 베트남의 젊은 층들이 본격적으로 영화관람을 하게 되면 그 시장은 폭발적으로 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한국 업체들의 노하우 또한 베트남 영화 산업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불과 십여년 전만 해도 베트남에서 영화관에 대한 이미지는 썩 좋지 않았다. 불건전한 문화생활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시장의 성장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CGV나 롯데시네마가 진출하면서 이런 이미지는 사라졌다. 세련된 인테리어와 차별화된 서비스 제공으로 영화관이 세련된 문화소비 공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여기에 CGV는 골드클래스, IMAX, 4DX, 침대관 등 고가의 특별관으로 구매력 있는 고객들을 영화관으로 이끌면서 극장은 ‘럭셔리한 문화생활’이라는 이미지까지 갖추게 되었다.



극장에 이어 영화 제작, 배급에도 열을 올리고 있는 두 회사


극장 시장에 잘 안착한 기업들은 다음 수순을 진행한다. 바로 영화 제작 및 배급이다. 극장을 하나의 콘텐츠 플랫폼이라고 본다면 플랫폼을 가지고 있는 기업들은 이 플랫폼에 자사 콘텐츠를 공급함으로써 수익구조를 확대시키고자 한다. CJ가 CGV와 CJ E&M을, 롯데가 롯데시네마와 롯데엔터테인먼트를 동시에 갖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CJ와 롯데가 베트남에서도 취하는 전략도 국내에서와 같다. 극장 점유율을 끌어올린 두 회사는 현지 영화 공동제작 및 배급사업에서도 박차를 가했다. CJ의 경우 작년 베트남 개봉 영화 197편(10월 기준)중 99편을 배급했다. 절반을 약간 넘는 수치다. 흥행 수익은 이보다 조금 더 높은 60%가까를 차지했는데 여기에는 CJ가 디즈니나 워너브라더스 등 할리우드 주요 제작사들과 위탁계약을 맺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작년에 348만명의 관객을 모으며 베트남 영화 흥행 1위에 올랐던 ‘어벤져스:엔드게임’도 CJ가 베트남에 배급한 작품이다. 롯데도 2012년부터 배급업을 시작, 매년 20여 편의 한국 영화와 현지 작품을 배급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제작에도 힘쓰고 있다. CJ는 2014년, 최초의 한·베트남 합작영화 ‘마이가 결정할게2’를 제작했고 2015년에는 한국 영화 ‘수상한 그녀’를 ‘내가 니 할매다’란 제목으로 리메이크 제작했다. 두 영화 모두 개봉 당시 베트남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도 2017년 한국영화인 ‘아빠와 딸’을 리메이크 한 ‘혼 파파 자 꼰가이’를 제작해 92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작년 2월에 개봉한 액션 영화 ‘하이픙’은 240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베트남 흥행 1위(매출액 기준)를 차지하기도 했다. 특히 영화 ‘하이픙’은 북미에 수출 되고 베트남 영화 최초로 넷플릭스에 팔리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들 기업들의 연이은 제작 성공에는 특기할 점이 있다. 유독 ‘한국 영화 리메이크작’이 많다는 점이다. 영화 ‘써니’는 ‘고고 시스터즈(Go-Go Sisters)’로 ‘과속스캔들’은 ‘스캔들 메이커(Scandal Maker)’, ‘엽기적인 그녀’는 ‘마이 쎄씨 걸(Yeu em Bat chap)’로 각각 리메이크됐다. 한국식 코미디물이나 가족물이 베트남에서도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과 베트남의 정서적, 문화적 유사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존재하는 ‘현지’의 장벽


2019년에 제작된 영화 ‘하이픙’은 베트남 현지 영화 역사상 가장 높은 흥행수익을 기록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놀라운 점은 따로 있다. 바로 ‘베트남에서 액션 영화는 흥행하지 못한다'는 공식을 깨고 달성한 성과라는 점이다.


*영화 하이픙은 싱글맘 하이픙이 범죄 조직에 납치된 딸을 구하는 과정을 그린 액션 영화로, 현지에서 '테이큰'의 여성 버전으로 소개됐다*


베트남은 원래 영화 제작에 제약이 많은 곳이다. 1993년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미국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던 ‘그린 파파야 향기’나 1995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던 ‘씨클로’ 모두 베트남 사람들은 볼 수 없었다. 자국의 어두운 현실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상영금지 조치를 당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영화법 제11조는 사회주의 체제에 반대되는 영화나 국민정서에 반하는 영화, 범죄행위를 묘사하거나 음란한 영화, 미신이나 사회악을 퍼뜨리는 영화, 국가와 민족, 혁명적 업적을 부정하는 영화의 제작을 막고 있다. 베트남 극장에 주로 ‘가족물’이나 ‘로맨틱 코미디’같은 장르가 걸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깐깐한 베트남 당국의 ‘영화 검열’ 덕택에 베트남 영화시장은 여전히 위축돼 있다. 극장에 다양한 볼거리가 없는 탓에 베트남 국민의 1인당 1년에 영화관람 횟수는 0.5편에 그치고 있다.


하이픙의 성공은 그래서 이례적인 것이었다. 베트남 당국의 규제를 피하면서도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는 액션물이 처음 나온 것이다. 그러나 영화제작사들이 또다시 ‘하이픙’같은 도전에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규제가 남아있는 한 제작할 수 있는 영화 내용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불확실성이 계속 남아있다면 시장에 뛰어든 한국 영화제작사들의 시도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베트남 시장에 안착한 한국 기업들이 겪는 문제는 또 있다. 제작부터 배급, 상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장을 아우르는 ‘한국식’ 사업구조에 대한 문제제기가 현지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탐 캄(Tam Cam)’ 사태다. 지난 2016년 베트남 언론들은 베트남에서 제작된 영화 ‘탐 캄’이 CGV에서 걸리지 않았던 문제를 지적하며 CGV를 비판했다. 당시 베트남 언론들은 “CGV가 시장의 지배적 위치를 이용해 터무니없는 배분율을 주장하고 있다”며 “국내(베트남) 업체들이 협상을 시도했지만 거절당했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베트남 언론들이 “CGV와 롯데시네마가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을 벌이다 과징금을 물었다”면서 비판했다는 점이다. 이는 CGV와 롯데시네마가 한국에서처럼 베트남에서도 독과점적 지위로 인해 제재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특히 베트남 입장에서는 두 기업은 ‘외국자본’일 뿐이다. 이 외국자본들은 ‘자국 기업 성장에 방해가 되는 불공정한 행위’로 인해 언제든 철퇴를 맞을 수 있다는 불확실성을 안고 가야 한다.


*이 글은 베트남 전문 매거진 Veyond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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