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추천 알고리즘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간 철저히 ‘개인별 맞춤 추천 알고리즘’을 고수했던 넷플릭스가 국가별 인기 콘텐츠 TOP10을 배치하기 시작했죠. 넷플릭스의 정책 변화로 이제 각 나라별로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위 사진은 최근 한국의 TOP 10 콘텐츠입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하이에나’, ‘킹덤’, ‘이태원클라쓰’ 등 대부분 한국에서 만들어진 콘텐츠입니다. TOP10 중 무려 7개나 됩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한국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이 리스트는 바로 베트남의 넷플릭스 TOP 10입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10개 중 7개가 한국 콘텐츠입니다. ‘종이의 집’이 순위에 있는 것도 똑같네요.
베트남에서 ‘한류’가 인기라는 말은 계속 들었지만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니 새롭습니다. 사실 한국 콘텐츠의 인기는 넷플릭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베트남 영화관에는 ‘한국 영화 리메이크작’이 자주 걸립니다. 영화 ‘써니’는 ‘고고 시스터즈(Go-Go Sisters)’로 ‘과속스캔들’은 ‘스캔들 메이커(Scandal Maker)’, ‘엽기적인 그녀’는 ‘마이 쎄씨 걸(Yeu em Bat chap)’로 각각 리메이크 되었죠. 2015년에는 한국 영화 ‘수상한 그녀’가 ‘내가 니 할매다’란 제목으로 리메이크 제작됐는데 개봉 당시 베트남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큰 흥행을 거두었습니다. 2017년에는 한국영화에서는 크게 흥행하지 못한 영화 ‘아빠와 딸’이 리메이크 되면서 흥행에 성공했죠.
그런데 앞서 리메이크된 작품을 살펴보시면 어떤 특징이 보입니다. 대부분 로멘틱 코미디나 드라마, 가족물 같은 작품이죠.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베트남 당국의 강력한 ‘검열’ 때문인데요. 베트남 영화법 제11조에는 사회주의 체제에 반대되는 영화나 국민정서에 반하는 영화, 범죄행위를 묘사하거나 음란한 영화, 미신이나 사회악을 퍼뜨리는 영화, 국가와 민족, 혁명적 업적을 부정하는 영화의 제작을 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극장에는 주로 ‘가족물’이나 ‘로맨틱 코메디’, ‘드라마’ 같은 장르가 걸립니다. 검열을 통과하기 쉽기 때문이죠. 게다가 베트남은 다른 아세안국가와는 달리 ‘유교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한국 콘텐츠에 대해 이질감을 덜 느끼게 되죠. 그래서 한국산 로코, 가족물 등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넷플릭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요. 베트남 TOP10에 오른 작품 중 2위는 ‘응답하라 1988’입니다. 역시 가족물이죠.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이 작품은 서울의 88년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그때 서울의 경제규모(1인당 GDP $4,686)와 지금 베트남의 경제규모(1인당 GDP $2,587)는 비슷합니다. 물론 그때는 휴대폰도 없고 인터넷도 없는 시대였지만, 한창 격동하는 시기였다는 점에서 지금의 베트남과 비슷할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응답하라 1988’을 보고 추억에 젖는다면 베트남 사람들은 일종의 동시대성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응답하라 1988 외에는 모두 한국에서 방영중이거나 막 종영된 작품들입니다. 이태원 클라쓰나, 사랑의 불시착, 하이에나, 하이바이 마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모두 최근작이죠. 꼭 드라마 작품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폭력적인 장면이 묘사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킹덤’도 순위에 보입니다. 한국과 베트남 모두 순위에 오른 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 또한 범죄를 묘사하고 있는 작품인데요.
이렇게 극장보다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넷플릭스에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는 넷플릭스에 대한 검열을 영화처럼 일일이 할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검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다루고 있는 영화 ‘풀 메탈 자켓(Full Metal Jacket)’같은 작품은 베트남 넷플릭스에서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밖에 작품들은 시청에 큰 제한이 없습니다. 글로벌 콘텐츠 플랫폼이 베트남의 ‘검열 장벽’을 어느정도 허물었고 그 사이를 틈타 다양한 한국 콘텐츠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넷플릭스에게는 너무나도 높은 베트남의 벽
넷플릭스에서 한국 컨텐츠가 거의 ‘차트 줄 세우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정작 베트남 친구를 만나서 ‘킹덤 봤냐’고 물어보면 그렇다는 대답을 듣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베트남의 넷플릭스 구독자는 고작 30만명에 불과합니다. 한국은 약 200만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베트남 인구가 1억에 육박하고 한국은 그 절반밖에 안된다는 것을 고려할 때 베트남에서 넷플릭스의 영향력은 극히 낮은 상황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베트남의 결제문화인데요. 베트남은 여전히 90%에 가까운 인구가 현금 결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넷플릭스를 구독하기 위해서는 카드 결제를 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수의 베트남 고객들을 놓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베트남에 아직 저작권 보호에 대한 인식이 떨어지는 것도 한 몫 합니다. 베트남에는 여러 ‘불법 스트리밍 사이트’ 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서 돈을 내지 않고 영화나 드라마를 봅니다. 한국 드라마 상당수도 이런 불법 사이트들을 통해서 유통되고 있습니다. 넷플릭스 월 구독료는 베트남에서 18만동, 우리돈으로 약 9000원정도 합니다. 한국과 큰 차이가 없죠. 그런데 한국과 베트남의 소득 차를 생각하면 꽤 큰 돈입니다. 따라서 대다수의 베트남 사람들은 굳이 큰 돈을 들여 넷플릭스 같은 사이트를 이용하기 보다는 불법 스트리밍 사이트를 이용하는 편을 택합니다.
베트남 현지에서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는 것도 넷플릭스의 높은 문턱으로 작용합니다. 베트남 유료 TV서비스 제공업체들은 넷플릭스가 베트남에 세금을 내지 않고 사업을 영위하고 있으며 콘텐츠 검열이 이뤄지고 있지 않아 악성 콘텐츠를 베트남에 들여올 수 있다고 소리 높여 비난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정부도 자국의 콘텐츠 산업이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 기업에 잠식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런 상황 아래 베트남 정부는 결국 강수를 꺼냈습니다. 주요 TV 제조사들에 넷플릭스에 대한 접근을 차단할 것을 요청한 건데요. 베트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삼성은 바로 베트남 당국의 요구를 수용해 TV에서 넷플릭스를 접속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조금씩 천천히 베트남 시장의 문을 열기로 한 넷플릭스
상황이 여의치 않자 넷플릭스는 베트남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넷플릭스 아태 담당 쿠엑유추앙 대표는 작년 8월 "넷플릭스는 베트남에 투자를 원하며, 베트남 법을 준수하고 세금도 성실히 납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계속 제기되었던 세금 이슈를 해결하겠다는 의지인데요. 넷플릭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현지 인력 채용, 베트남 영화 구입 등에 관한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응웬만흥 정보통신부 장관은 판권 구매에만 그치지 말고 넷플릭스가 베트남 업체들에 투자해서 콘텐츠를 제작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좋지 않은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가 계속 문을 두드리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1억에 가까운 인구, 절반을 넘는 30대 이하 인구비율, 성장하는 소비여력 등을 놓고 봤을 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시장입니다. 카드결제가 보편화되고 다국적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지불능력을 갖추게 되면 폭발적으로 확대될 수 있는 시장입니다.
넷플릭스의 베트남 시장 점유율 확대는 한국에도 긍정적입니다. 한국 콘텐츠들이 더 많은 베트남들에게 소개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베트남뿐만 아니라 여러 아세안 국가들이 넷플릭스를 통해서 한국 콘텐츠를 시청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등의 TOP10 콘텐츠에서 한국 콘텐츠는 최소 3~4개 이상 있습니다. 한국 콘텐츠가 아세안 국가들에서 어느정도 인기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동안 언어 장벽에 갇혀 국내에만 머물러 있었던 한국 콘텐츠들이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을 통해승승장구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꼭 넷플릭스에서만 국한된 일도 아닙니다. 한국 아이돌들의 뮤직비디오는 유튜브 조회수는 보통 국내보다 국외에서 더 많이 발생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외국어 영화로는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이제 K-콘텐츠의 소비자는 한국인만이 아니라 아세안 국가들, 그리고 전세계인들에게 까지 넓혀졌습니다. 네덜란드 친구와 베트남 친구, 미국 친구와 뉴질랜드 친구가 함께 모여 킹덤 속 ‘갓’과 ‘조선 다이너스티’에 토론하는 장면도 머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글은 베트남 전문 매거진 Veyond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