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전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은행이 안되는 곳’이다. 카드는 물론이고 계좌조차 없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전체 국민 중 은행 계좌를 보유한 사람이 30%에 불과하며 신용카드 보급률은 3%대에 머물고 있다. 단순히 베트남이 ‘개발도상국’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인근 지역 아세안 개발도상국들의 은행 계좌 보유 비율은 보통 60%를 넘는다. 그렇다면 이는 베트남만의 특수한 상황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 가보자. 베트남은 1955년부터 75년까지 장장 20여년 동안 남북으로 나뉘어 이념전쟁을 벌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공산주의 정권은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토지와 예금 등을 국유화했다. 물가 관리 등의 실패로 85년에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는데 이 화폐개혁마저 실패하며 물가가 폭등했고 시민들은 큰 혼란을 겪었다.
전쟁, 재산 몰수, 실패한 화폐개혁을 연이어 겪은 베트남 사람들의 머릿속에 돈은 온전히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지금도 베트남 곳곳에는 금고를 파는 상점이 있다. 부유한 집은 집안 곳곳에 금고를 배치해 현금과 현물을 보관한다. 자신의 소득을 구태여 정부에 공개하길 꺼리는 것도 베트남 사람들이 현금을 선호하는 큰 이유 중 하나다.
그래서 베트남의 금융산업은 여전히 정체된 상태다. 신용카드를 건너 뛰고 현금에서 전자결제로 바로 건너 뛴 중국과도 완전 다른 상황이다. 금융시스템의 개선이 시급했던 베트남 정부는 지난 2016년에 ‘현금 없는 사회’를 선포했다. 2020년까지 현금결제 비중을 전체 대비 10% 이하로 낮추고, 은행 계좌를 보유한 인구비중을 현재 30%대에서 70%대로 높이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베트남 정부의 야심찬 계획은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미미한 수준의 개선은 이뤄졌지만 여전히 베트남의 상거래는 현금이 지배하고 있으며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은 은행 대신 전당포에서 돈을 빌리고 있다.
이런 척박한 환경을 가진 베트남이지만 수많은 나라들 특히 한국의 금융기업들은 베트남 금융시장을 열어젖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신한은행, 우리은행, 국민은행 등을 비롯한 국내 주요 은행들은 이미 베트남에서 자리를 잡고 영업을 하고 있으며 한화생명, 롯데카드, 현대카드 등 비은행 금융기업들도 베트남 시장 공략을 위해 나서고 있다. 투자 금액도 점점 커지고 있다. 지난 2016년에는 2340억, 2017년에는 1477억, 2018년에는 3482억을 투자했으며 2019년에는 3분기까지의 기록으로만 3532억을 달성해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들이 아직 갈 길이 먼 베트남 금융 시장에 뿌리를 내리려고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결국에는 열릴 시장’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겉으로만 보면 베트남의 금융시장이 매우 척박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기회다. 계좌를 만들고 새로 금융거래를 할 수 있는 ‘잠재고객’들이 충분히 많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연히 ‘된다’는 기대감만으로 시장에서 버티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국 금융기업들도 어떤 ‘신호’를 읽어냈기 때문에 시장의 문을 계속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금융거래와 관련한 베트남 사람들의 부정적인 경험은 중앙정부의 정책에서만 비롯되지는 않았다. 은행 자체도 믿을만한 곳이 못 됐다. 계좌에서 돈이 사라지거나 은행 직원이 돈을 빼가는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지난 2014년에는 은행 직원들이 공모해 공문서위조 등을 통해 2000억원 대의 사기행각을 벌인 것이 들통났다. 2017년에도 한 고객이 은행에 예치해 둔 87억동(약 4억3,000만원)이 모두 사라진 사건이 벌어졌지만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이듬해인 2018년에도 베트남의 한 은행간부가 VIP 고객의 예금 약 100억원을 횡령해서 해외로 달아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보도조차 되지 않은 소액 예금 사기, 횡령 등은 수도 없이 일어났다.
금융기업은 신용을 기초로 거래가 성사되는 산업이다. 그 신뢰를 담보하지 못한다면 누구라도 마음 놓고 돈을 맡길 수 없다. 그러나 베트남 은행들은 금융사고를 연례행사처럼 터뜨렸고 베트남 사람들은 ‘은행에 돈을 예금해두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은행이 가장 기본적인 약속인 ‘예금 보장’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때문에 베트남 사람들은 계좌개설은 물론 각종 간편결제 등 현금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모든 거래를 불신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쇼핑몰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 조차도 현금으로 대금을 지불했다. 베트남 당국이 은행을 통한 금융거래를 늘리고 싶어도 시민들이 요지부동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베트남의 이런 금융불신은 한국의 금융 기업 입장에서는 기회가 된다. 한국은 신용거래가 일상인 나라다. 카드, 할부결제, 대출 등 대부분의 금융거래가 위험요소 없이 안전하게 진행된다. 예금이 갑자기 사라지는 일도 생기지 않을뿐더러 만에 하나 금융사의 실수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책임을 질 것이라는 신뢰가 담보돼 있다. 한국 금융기업이 지키고 있는 이런 당연한 원칙들은 베트남에서는 차별화 요소가 된다. ‘한국계 은행에 돈을 맡기면 안전하다’는 신뢰자산은 당장 눈에는 보이는 이득이 되지는 않지만 차곡차곡 쌓여 나간다면 언젠가 큰 성과로 되돌아오게 된다.
베트남을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리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를 보았을 것이다. 베트남의 오토바이 등록 대수는 2018년 기준 4600만대를 넘었다. 한 가정에 한대 이상의 오토바이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대중교통이 아직 잘 갖춰지지 않았고 차량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베트남에서 오토바이는 서민들의 발이 되어주었다.
베트남의 경제는 지난 5년간 매년 7%에 가까운 고공성장을 기록했다. 시장에 돈이 돌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더 큰 소비시장에 눈을 돌린다. 이를테면 오토바이대신 조금 더 안정적인 자동차를 구매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베트남의 2019년 베트남 자동차 판매량이 전년대비 19%가 증가하여 역대 최고치인 41만 9104대를 기록했다. 2014년 판매량(15만7810대)과 비교했을 때 약 2.65배 늘어난 수치다.
그런데 우리가 차량을 구입했을 때를 떠올려 보자. 차량 구매대금을 일시불로 지불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보통은 금융기관과 연계해 할부로 구입한다. 할부구매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금융적 토대가 있어야 한다. 꼭 자동차만 그런 것도 아니다. 베트남 금융 감독 위원회에 따르면 베트남의 소비자 대출 시장(consumer lending market)은 2016년에 50.2%, 2017년에는 65% 성장했는데 특히 주택(52.9%), 가구(15.3%), 자동차(8.3%) 구매를 위한 대출 수요가 크게 늘었다고 한다. 베트남의 경제가 계속 성장하고 있는 만큼 자동차 뿐 아니라 다른 고가 물건에 대한 소비도 계속 늘어날 것이며 이에 따르는 금융 수요 또한 같이 늘어날 것이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은행들은 바로 이 부분에 주목하고 있다. 베트남 소비자금융 전문회사인 'FCCOM' 지분 절반을 인수하며 진출 준비를 마친 현대카드는 현대자동차와 연계와 할부금융 시장의 문을 두드릴 예정이다. 한화그룹 또한 베트남 1위 민영기업 빈그룹의 지분을 사들이며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한화는 소액대출과 투자증권, 더 나아가 자동차 제조사업을 하고 있는 빈그룹과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손해보험, 자동차 할부 시장까지 그 영역을 넓힐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의 1위 외국계 은행인 신한은행은 고객과의 접점을 넓히기 위해 베트남 국민 메신저인 잘로를 통해 신규회원을 유치하고 있으며 베트남 간편결제 업계 1위인 ‘모모’와 제휴해 신용대출을 받고 있다. 베트남 2위 부동산 플랫폼 업체인 ‘무하반나닷’과는 담보대출 사업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는 삼성전자와 함께 ‘삼성페이’ 선불카드 서비스를 추가로 내놨다. 모두 소매금융을 공략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다.
베트남은 30대 이하 인구가 절반에 육박할 정도로 젊은 나라다. 스마트폰 보급률도 80%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통 이런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물건도 구입하고 넷플릭스도 구독할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베트남에서 넷플릭스를 구독하는 사람은 30만명에 불과하다. 베트남 인구 절반에 불과한 한국의 가입자 수가 200만을 넘어선 것과 비교하면 초라한 성적이다(물론 넷플릭스 구독요금이 물가 대비 비싼 이유도 있다). 전자상거래 또한 불모지에 가깝다. 2018년 기준 전체 소매 판매 금액 중 온라인 쇼핑이 차지하는 비중의 경우 한국은 24.1%이지만 베트남은 2.3%로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이런 결과가 나오는 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전자 상거래나 글로벌 서비스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카드나 전자결제를 사용해야 하는데 계좌 자체가 없으니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계좌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베트남 시장에서 전자상거래 업체나 온라인 플랫폼 업체들은 시작부터 큰 장벽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추세가 계속될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실제 호치민의 젊은 층을 중심으로 계좌 보급률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은행에 대한 불안감보다 전제결제에 대한 편리함, 넷플릭스나 구글 플레이, 앱스토어 같은 글로벌 서비스의 이용 욕구가 더 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기대를 반영하듯 지난 2019년 한해 베트남 핀테크 산업에 유치된 투자금 중 98%가 결제 솔루션에 집중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비슷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결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은 그만큼 그 시장의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의미다.
올해 초부터 확산된 코로나19도 이런 변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베트남 결제중계망 사업 기관(NAPAS, National Payment Corporation of Vietnam)은 2020년 1월 구정부터 3월 중순 사이 비현금 결제 건이 전년 동기 대비 76%, 거래 금액은 124% 증가했다고 밝혔다.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사람들을 격리하고 동선을 제한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비대면 전자결제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경험은 일단 한 번 시작하고 나면 잘 회귀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코로나 19 이후로 베트남의 전자결제 시장은 본격적인 확신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베트남 정부는 2019년부터 매년 6월 16일을 ‘현금 없는 날(Ngày không tiền mặt)’로 지정하며 현금 사용을 줄일 것을 장려하는 행사를 벌였다. 전기, 수도 요금 등을 온라인으로 납부하게 한 데 이어 올 3월 12일부터는 온라인을 통해 교통법규 위반 벌금을 납부 서비스를 개시하기도 했다.
베트남 정부의 ‘현금 없는 사회’로의 전환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데. 2019년 12월까지 52개 시·성(province) 도시의 모든 학교 및 병원에 무현금 결제 솔루션(카드 리더기, 또는 QR 코드 스캐너, 전자결제 모바일 앱)을 마련하도록 지시한 바 있으며 일반 상점에서도 결제 솔루션을 도입할 것을 장려하고 있다. 또 2025년까지 성인 인구 80% 이상이 은행계좌를 보유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성인 인구의 최소 25~30%가 신용 기관에 예금/저축을 보유하고 비현금 결제 또한 연간 20~25%씩 늘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
베트남의 이런 노력은 단순한 정책 목표에 그치지 않는다. 현금으로만 이뤄지는 거래 흐름은 정부에서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만큼 과세도 누락된다. 현금결제를 줄이고 모든 거래가 기록되는 비현금 결제를 늘리는 것은 베트남 정부 자체에서도 한시가 급한 당면과제다.
정부의 인프라 보급, 지속적인 소득 증가, 시장의 유인 등 여러 요소들을 고려했을 때 베트남의 결제시장 금융시장은 발전할 수밖에 없다. 한국 은행들이 ‘안되는 시장’인 베트남에서 꿋꿋이 버티고 있는 것도 이런 황금기가 조만간 찾아올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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