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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호 Oct 26. 2020

한국 정부는 왜 ‘신남방 정책’을 추진할까요?

미 - 중의 압박 속에서 해답을 찾고 있는 한국

잠시 세계지도를 펴 보실까요? 그리고 한국을 찾아봅시다. 한국은 아시아 대륙을 기준으로 가장동쪽 끝에 위치해 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기준으로는 저 먼 태평양을 건너서야 도달할 수 있죠. 이 상태에서 잠시 전 세계의 ‘힘의 균형’을 봅시다. 지금 세계는 ‘미국’이라는 원탑 국가가 국제질서를 만들고 있습니다. 갈등이 있다면 조정을 하고 균형을 깨려는 시도를 하는 나라에는 동맹국들을 동원해 압박을 가합니다. 이따금 무력을 사용하기도 하죠. 이를 두고 어떤 전문가들은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미국의 질서 하에 유지되는 세계 평화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세계 질서를 정리하고 있는 미국은 그만큼의 보상도 가져갑니다. 국제정치의 장에서 자국에 조금 더 유리한 정책을 압박하기도 하고 자국이 통제할 수 있는 달러를 기축통화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런 ‘팍스 아메리카나’의 상황이 냉전 이후부터 우리가 쭉 지켜보던 ‘세계의 구도’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 상황이 많이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정말 미국이 ‘원탑’이며 세계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국가냐는 의구심이 생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중국의 부상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가 저물고 ‘양극’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패권은 ‘미국’에게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최근 미국과 중국이 벌이고 있는 ‘무역전쟁’은 양국의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아주 큰 사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까 펴신 지도를 다시 보시길 바랍니다. 한국은 중국을 기준으로 볼 때 그들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기준으로 볼 때에 한국은 자신들이 쳐놓은 동맹국의 경계선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바로 이런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한국에 애로사항이 발생합니다. 한국은 미중 양국 모두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중국과는 매우 많은 교역을 진행하며 국제분업의 큰 축을 나누고 있습니다. 미국과는 명시적인 동맹국으로서 경제적 협력은 물론 안보적 협력까지 진행합니다. 한국은 양국 모두와의 관계를 쉽게 끊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종종 두 나라로부터 둘 중 하나를 ‘선택’ 하길 강요받습니다. 그리고 이런 난감한 외교상황에서 한국은 자주 ‘제3의 카드’를 꺼내듭니다. 이를테면 문재인 정부가 최근 주장한 ‘신남방 정책’ 같은 겁니다.



뻗어나가려는 중국과 에워싸려는 미국


시진핑 중국 주석은 지난 2013년 9월 카자흐스탄의 한 대학 강연에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중국은 앞으로 35년 간(2014~2049) 새로운 실크로드를 구축할 것이며 이를 통해 중국과 주변국가의 경제․무역 합작 확대의 길을 열겠다는 포부입니다.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라고 불리고 있는 중국의 이 계획은 교통망을 통해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 권역을 구축하겠다는 게 요지입니다.



이 같은 중국의 계획에 큰 불편함을 느낀 나라가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전쟁은 쉬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영토를 둘러 싼 분쟁이나 전쟁은 확실한 명분이 없다면 국제사회에 큰 비난을 받게 되거나 제재를 받게 됩니다. 그렇다고 각 나라들이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그것은 경제전 형태로 일어납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도 그와 같은 맥락이지요.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도전과도 같았을 겁니다. 미국이 아닌 중국이 중심이 되는 독자적인 경제 축을 만들겠다는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은, 안그래도 급부상하는 중국을 지켜보던 미국에게 위기감을 주었을 겁니다. ‘팍스 아메리카나’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죠. 중국의 일대일로 선언이 있은 지 4년 뒤. 그러니까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지 얼마 후 미국은 새로운 개념을 꺼내듭니다. 바로 ‘인도-태평양 전략’입니다.


2017년 11월, 아시아 순방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FOIP: Free and Open Indo Pacific Strategy)’이란 개념을 꺼내듭니다. 이날 나온 개념이 대단히 구체화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전까지 ‘아시아-태평양’을 중심으로 그었던 미국의 전략 구상선을 ‘인도’까지 늘린 겁니다. 그런데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꺼낸 구상은 생각보다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아까 펼친 지도를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아시아-태평양’의 관점으로 볼 때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 경계의 가장자리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축을 인도양까지 펼친다고 생각해봅시다. 경계가 다시 그어집니다. 중국을 에워싸는 형태로요. 일각에서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을 포위하겠는 구상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구체화된 ‘인도-태평양’ 전략을 지켜보자면 그 같은 의문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2018년 11월, 백악관 대변인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다시 한번 거론했습니다. 미국이 인도-태평양지역의 번영을 견인하고 있다면서 앞으로도 투자와 경제적 협력을 확대해나가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발표 말단에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추가됩니다.


미국은 공동의 위협에 대응하고 공유 자원을 보호하며 주권을 보장하기 위해 인도-태평양 전역에 걸쳐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을 비핵화하고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며 테러와 폭력적 극단주의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이 지역과 공조하고 있다. 미국의 안보와 번영은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에 달려 있으며 미국은 현재에 그리고 후대를 위해 이 비전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규모를 불문하고 모든 국가와 지속적으로 협력할 것이다.



눈여겨볼 것은 “항행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는 대목입니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해양로를 통한 물류수송은 모든 나라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비행기로도 수송이 가능하긴 하지만 비용이 매우 비싸기도 하거니와 원유나 철강 같은 원료들을 실어나르기엔 부적절합니다. 육로 또한 해로만큼 값싸게 대량수송을 할 수 없습니다. 전 세계가 ‘분업’처럼 교역을 하고 있는 지금 시대에 해상로에 문제가 생긴다면 큰 애로사항이 발생합니다. 상당량의 원유가 오가는 호르무즈 해협을 두고 미국과 이란이 신경전을 벌이는 이유도 마찬가지죠.



중국은 남중국해에 대한 배타적인 영유권과 통제권을 주장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인공섬을 건설하고, 군사기지화를 꾀하며, 민간인 거주 유지 및 확대를 통해서 영토화를 도모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중국의 도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미국의 영향력이 적은 인도양으로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는 ‘육상’과 ‘해상’ 두 가지로 나뉘는데 바로 이 ‘해상 일대일로’는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거쳐 인도양을 지나 지중해에 이르는 라인 구축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대해 미국은 “위협에 대응하고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이 지역(인도-태평양)과 공조"하겠다면서 “지난 한 해 동안 인도-태평양 지역에 도합 94억 2,000만 달러 규모의 군수 물자와 서비스를 직접 판매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양 나라의 대결구도와도 같은 정책들을 두고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새로운 냉전의 형태로 귀결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2019년 11월, 미국 국무부는 ‘인도 태평양 전략 보고서’를 내놓습니다. 이 보고서는 “트럼프 대통령은 인도태평양에서의 미국 관여를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둬 왔다. 미국은 이 지역에 대한 깊은 관여 및 번영에 전념하고 있다”면서 “미국과 동맹국, 파트너들은 자유롭고 개방된 지역의 질서를 보호하는 데 최전선에 있다. 모든 국가는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을 뒷받침하는 규칙과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공동 책임을 진다”고 말했습니다.

뒤이어 보고서는 중국이 남중국해 주변에 임의로 그은 해상 경계선인 소위 ‘구단선’이 “근거 없고 불법적이며 비합리적”이라면서 “이런 중국의 항행 자유 침해 때문에 아세안 국가들이 2조5000억 달러(약 2900조 원)에 이르는 (해양) 에너지 자원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없으며, 이로 인한 역내 불안정성 및 충돌 가능성도 높아졌다”고 비판했습니다.


보고서가 공개된 날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에 참석해 “중국은 협박을 통해 (남중국해에서) 아세안 국가들의 해양자원 이용을 막으려 한다. 아세안 국가들은 새로운 제국주의 시대에 별 관심이 없을 것”이라며 비판했습니다. 이쯤되면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인도양과 태평양을 두고 벌이는 두 나라의 신경전이라는 게 조금 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격전의 중심 아세안(ASEAN)


아세안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인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의 앞 글자를 따왔습니다.현재는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태국, 브루나이,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총 10개국이 참가하고 있습니다. 아세안은 유럽연합처럼 별도의 의회가 있거나 유로화 같은 공통 통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역,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해나가고 있습니다.



아세안소속 국가들은 주요 국가들과 개별적인 외교를 펼치는 게 아니라 ‘아세안+1’ 형식의 외교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사결정도 만장일치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소속 회원국 어느 한 나라의 이득도 해치지 않겠다는 의지이자 동시에 다른 국가들과의 외교에서 협상력을 높이는 전략이기도 합니다.


아세안은 중국의 ‘일대일로’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모두에 필요한 지리적 요충지입니다. 태평양을 넘어 인도양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세안 지역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게 다가 아닙니다. 아세안은 인구 6.4억명, GDP 2.7조달러의 엄청난 시장입니다. 아세안을 공동의 권역으로 치자면 아시아에서 세번째로 큰 시장이자 동시에 세계에서 7번째로 경제 규모를 갖고 있는 곳으로 성장속도와 잠재력 또한 충분합니다. 이런 아세안에 대해 여러 강대국들은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아세안의 전략은 일명 ‘양다리 걸치기(straddling)’입니다. 강대국 사이에 경쟁을 부추겨서 최대한 이득을 취한다는 내용입니다. 각 개별 국가들의 경제나 외교상황과는 무관하게 아세안 전체의 입장을 내세우며 ‘더 나은 조건’을 제공하는 나라와 협력을 이어나가겠다는 게 아세안의 방침이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세안 개별 국가들의 이해관계는 조금씩 다릅니다. 중국의 군사적, 경제적 확장에 위협을 느끼는 베트남이나 필리핀과 같은 나라들은 미국과의 연대를 통해 균형을 찾으려고 합니다.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 된 캄보디아와 라오스 나라들은 투자 유치를 위해 중국과 더 긴밀한 협력을 하길 원합니다. 이렇게 각 국가별로 상이한 이해관계를 ‘아세안’이라는 공동체의 이득으로 묶음으로써 아세안은 전략적으로 중국과 미국의 ‘대결 구도’에서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는 일종의 ‘중립적 완충지’로 자리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세안의 이런 전략도 위기를 맞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드러난 게 2018년 11월에 개최된 아세안 정상회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미국은 남중국해를 영토화하려고 하는 중국에 대해 아세안에게 공동으로 대응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을 배제한 새로운 지역질서를 형성하자고 요구했습니다. 양 강대국이 서로 다른 ‘꿈’에 동참할 것을 제안하자 아세안 국가들은 당황했습니다. 당시 아세안 의장국이었던 싱가포르의 리셴룽 총리는 폐막연설에서 “아세안이 특정 국가 또는 다른 한 국가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어느 한쪽에 서기를 강요받는 상황이 올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습니다.

 


한국이 모색한 새로운 생존전략 : 신남방정책


지난 2017년 11월 7일 열린 한미정상회담 직후 청와대에서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정상회담 다음날인 8일, 공동언론발표문이 공개되었는데 여기에는 '트럼프 대통령은 상호 신뢰와 자유·민주주의·인권·법치 등 공동의 가치에 기반한 한·미 동맹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 안정과 번영을 위한 핵심축임을 강조했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와대는 다음날인 9일, “한국은 이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돌연 발표문을 부정했습니다.



날 청와대는 "일본이 인도·퍼시픽(태평양) 라인이라고 해서 일본·호주·인도·미국을 연결하는 그런 외교적 라인을 구축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편입될 필요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한 것이고 우리는 동의한 것이 아니다"면서 수차례 해명했습니다. 조금은 특이한 일입니다. 양국이 공동으로 발표한 언론발표문을 바로 다음날 부정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소동에는 흥미로운 배경이 숨어있습니다. 사실 아세안 국가들이 직면한 상황은 한국에게 별달리 새로운 게 아닙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냉전 이후의 한국은 늘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벌여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이 미국이 제안하는 ‘인도-태평양’ 라인에 동참한다는 것은 중국과 대척점에 선다는 것을 의미하며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이 동맹국인 미국을 버리고 ‘일대일로’에 협력한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에게는 제3의 길이 필요했습니다.


이 ‘제3의 길’은 2019년 6월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때 미국 국방부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군사적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한미 정상은 강력한 한미동맹이 인도태평양 지역 평화와 안보의 ‘린치핀(linchpin·핵심 축)’이라는 점을 재확인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과 한국의 신남방정책의 협력 심화를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고 덧붙입니다. 해석하자면 미국의 ‘인도-태평양정책’을 한국의 ‘신남방 정책’과 결합하는 방식으로 협력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제안은 중국에게도 돌아갔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2월, 중국 베이징에서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 직후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과 한국의 신남방·신북방정책 간의 연계 협력을 모색키로 합의했고 구체적 협력 방안을 담은 공동보고서가 채택됐다"면서 "이를 토대로 제3국에 공동진출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다양한 협력 사업들이 조속히 실행되길 기대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중국과 미국의 대결이 격화되고 양쪽 모두 자신의 길에 동참할 것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선택은 ‘신남방정책을 통해 양 국가의 핵심전략에 모두 협력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여기서 ‘신남방정책’의 구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남방정책은 아세안 10개 국가에 인도를 포함한 구상입니다. 물론 아세안과 인도 모두 무역을 중점으로 하는 한국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시장입니다. 그러나 신남방정책은 단순히 ‘신흥시장’을 묶어둔 게 아닙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국제정세 속에서 인도와 아세안의 위치를 봐야 합니다.


아세안과 인도는 문화적 유대감이 깊은 나라입니다. 베트남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인도와 종교적으로도 이어져 있습니다. 인도는 아세안 직접 지배한 적이 없지만 문화적·지역적·종교적으로는 계속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처한 운명도 비슷합니다. 인도는 잠재적으로 중국과 비견될 국가로 성장할 것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아직 경제규모는 중국의 1/5 수준에 불과하며 중국에 대한 경제의존도 또한 높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일대일로’라는 이름으로 강력한 확장 정책을 취하고 있고 인도는 자신들이 중국의 영향력 아래 놓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도가 쉽게 미국 편에 서서 중국의 봉쇄 전략에 가담할 수도 없습니다. 인도 경제에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한국과 아세안, 인도의 공통 목표가 보입니다. 이들 국가는 인도-태평양 지역이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는 대결장이 되어서는 안 되고, 미중 두 강대국의 패권 싸움의 희생양이 되어서도 안된다는 점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 세 나라가 공통의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새로운 지역질서를 구축하게 된다면 미-중 양 국간의 대결구도에서 절충점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 구체적 내용이 없는 ‘신남방정책’


 “경제가 위기로 치닫는데 대통령은 태국, 미얀마, 라오스로 갔다. 더 웃긴 것은 거기서 (최첨단) 4차산업을 논한다는 것이다. 삶은 소 대가리가 웃을 일이다”


앞선 발언은 지난해 9월 문 대통령의 아세안 순방을 비판하며 조경태 자유한국당 의원이 했던 말입니다. 한국에게 아세안 국가는 그 어느때보다 중요한 위치로 올라섰지만 여전히 많은 정책 결정자나 입법자들이 아세안 국가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실제 그간 한국은 아세안 국가를 경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산정책연구원 이재현 선임연구위원은 “새 정부가 들어선 초기 아세안에 대해서 관심을 잠시 보였다가 다른 사안에 의해 아세안은 아젠다에서 밀려났다. 이전 정부에서 축적된 기반이 부실하기 때문에 매번 새 정부 아세안 정책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상황을 되풀이했다. 상대적으로 북한 관련 문제로 아세안에 접근할 때 한국은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이때도 아세안에 일방적으로 우리 입장에 대한 지지만을 요청했고, 아세안의 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유보적 입장을 취하곤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북한 문제 외에 아세안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아세안 국가들도 한국에 대해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한국을 다른 지역 국가들과 달리 부차적인 혹은 이차적인 (secondary or second tier) 국가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비판합니다.


이재현 연구원의 말처럼 한국은 그간 아세안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아세안 국가들에 적절한 외교적 지위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지금 정부에서 갑자기 ‘신남방정책’을 취한다고 해도 아세안 국가들 입장에서는 곧바로 신뢰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아직 축적된 성과도, 정서적 교류도 부족한 상태이니까요.


그러나 아직 신남방정책에서 뚜렷한 디테일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신남방정책의 화두가 경제적으로 국한된 탓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신남방정책을 ‘신흥국에서의 투자를 확대하고 소비시장을 확보하는 전략’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은 자칫 아세안 국가들의 불신을 살 수도 있습니다. 한국은 지난 20여 년간 꾸준한 아세안 국가들과의 무역에서 큰 흑자를 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기술력이 대부분의 아세안 국가보다 높고 또 두 나라가 국제분업상 얽혀 있다보니 한국과 아세안 사이 무역 구조는 한국에게 매우 유리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남방정책이 ‘경제’나 ‘투자’같은 구호에 그친다면 자칫 아세안 국가들에게 한국이‘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나라’로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신남방정책’의 내용을 구현하기 위해서 한국은 아세안 국가에 새로운 경제적 외교적 어젠더를 제시할 내용을 채워야 하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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