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제가 연예인을 소비하는 법

결과물만 봅니다. 

저도 나이 들기 전 까지는 몰랐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제 관점입니다...) 제가 남들과 상당히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요.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몇 가지 말씀드리자면요.


저는 98학번입니다. HOT가 데뷔한 게 96년이고, 젝스키스가 데뷔한 게 97년입니다. 저는 지금도 이들이 몇 명인지, 멤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SES와 핑클도 전혀 몰랐습니다만 군대 가서 모른다고 구타당해서(...) 강제로 외웠습니다. 


작년 (2022년) 대선 개표방송에서 SBS는 걸그룹 에스파(aespa)의 Next Level을 사용해서 화제에 올랐습니다. 선거 다음날 출근하니 옆자리 동료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한 얼굴로, 아 선거방송이 드디어 차세대 수준(Next Level) 이 되었다는 의미냐고 물었습니다. 동료는 에스파의 넥스트레벨을 모르냐고 물었고, 저는 에스퍼맨은 안다고 그랬습니다. (... 여기서 웃으면 아재인증입니다) 이후 긴 시간, 저는 동료로부터 SM아이돌 계보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뢰매(...)의 주인공 에스퍼맨(심형래 분). 당시 어린이들에게 최고인기였습니다. 출처:나무위키


40대 중반의 아재가 연예인 모르는 게 자랑이라고 당당한 거냐.. 라 하실 수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저도 영화, 드라마도 좋아하고 음악도 즐겨 듣습니다.


다만, 제가 좋아야 듣고 보는 것이지, 남들이 듣는다고 나도 듣진 않습니다. 제 취향에 맞는 것만 듣기에도 하루가 짧은걸요.


여기에 하나 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물만 좋아합니다. 요즘 연예인들은 자신들을 아티스트라고 칭하더라고요. 예전에는 없던 호칭입니다. 저는 예술가가 만든 예술작품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예술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걸작이라고 생각하지만, 다 빈치가 막 좋고 보고 싶고 그러진 않습니다. 


사실 여러분도 이미 이렇게 하고 계십니다. 


'너의 이름은', '스즈메의 문단속'을 재미있게 보신 분들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너의 이름은' 포스터나 굳즈를 사더라도 신카이 마코토 감독 굳즈(있는지조차 모르겠지만)를 사는 분은 없겠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아티스트이고, 그의 아웃풋이자 아트가 '너의 이름은'인 거죠. 우리는 아웃풋을 소비하지 아티스트를 소비하지 않았습니다. 


스즈메의 문단속 포스터와 신카이 마코토 감독. 얼굴은 처음 보시는 분도 많을 겁니다. (출처 : KBS)


이걸 연예인에 대입해 볼까요?


연기자(아티스트)가 하는 연기는 아웃풋입니다. 배우 황정민 씨가 나온 '서울의 봄'은 명작입니다. 황정민의 연기가 '아웃풋'이니 기억하고, 찬사를 보냅니다.

다만 배우 황정민은 별개입니다. 그는 일을 한 것이고, 우리는 그 일의 결과물을 보며 심취하고 콘텐츠로서 소비했습니다. 하지만 자연인 황정민은 그냥 일하는 노동자입니다. 연기라는 일을 하고 돈을 받죠. 저는 황정민이 결혼을 누구랑 했고 아이가 몇이고 이런 건 관심 없습니다. 연기를 잘하면 그뿐입니다.


가수 박정현은 엄청나게 많은 히트곡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꿈에'는 저도 종종 즐겨 듣는 좋은 노래입니다. 저는 그 콘텐츠를 소비하지만, 박정현을 소비하진 않습니다. 그녀의 좋은 노래들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 노래를 부른 가수 박정현은 제게는 그저 '자신의 일을 잘해서 나한테 좋은 노래를 준 고마운 사람' 정도입니다. 

그래서 박정현이 뭘 하고 살건 관심이 없습니다. 술? 도박? 마약? 스캔들? 요즘 말로 알빠노(내 알바 아님)입니다. 

좋은 노래를 소비하는 데는 관심이 있지만, 어차피 저와 마주칠 일 없는 사람에 대한 정보는 제게는 쓸데없는 것일 뿐입니다. 


주변에서 연예인 가십 이야기를 할 때 소외돼서 싫다는 분도 있으실 겁니다. 저는 포털의 연예기사를 안 봅니다. 20년도 넘었습니다. 그런 것 모르고 소외되어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없었습니다. 위의 넥스트 레벨 같은 상황이 왕왕 나옵니다만, 전혀 문제없습니다. 자꾸 그런 걸로 대화에 끼지 못해서 소외되는 것 같으면 여러분이 먼저 그 사람을 소외시키세요. 인생이 더 풍요로워질 겁니다. (제가 해 봐서 압니다)


우리가 (가수/연기자)와 그의 (노래/연기)를 분리하지 않기 때문에 기레기가 창궐합니다. 썩은 음식 주변에 날파리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작업물'이 아닌 '작업자'에게 간다면, 그 작업자를 조리돌림하면서 클릭수를 채울 기회가 기레기들에게 생기니까요.


출처:대학내일


좋은 예가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나는 솔로 16기 돌싱특집이었습니다. 대구에 사는 영숙이와 미국 사는 상철이 엄청난 화제가 되었죠. 제 주변 사람들은 그들의 기사, 인스타를 공유하며 A와 B가 뭘 했네, C에게는 뭐라고 글을 남겼네 등등으로 계속 소비했습니다. 

그냥 TV쇼일 뿐인데 말이죠. 카메라가 비춰주는 부분만 소비하고 (그마저도 PD의 악마의 편집이 있다는 걸 주지해야 합니다) 이외에는 관심을 안 가지면 그만인데, 과도한 몰입은 계속됩니다. 


당사자는 고통스럽고,

당신의 에너지와 시간은 탈탈 소비되며,

기레기는 인스타를 염탐하며 기사를 쏟아내서 클릭수로 돈을 법니다.


오죽하면 이런 책이 나올까요. 


이쯤 되면 제가 왜 갑자기 왜 이런 글을 쓰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저는 '나의 아저씨'를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또 제 인생드라마 중의 하나는 2007년 방영했던 '하얀 거탑'입니다. 중저음의 목소리로 김명민에게 조언을 하는 이선균은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2023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접한 그의 비보 앞에서 생각해 봅니다. 그의 비극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 저는 대중이 그를 소비하는 방식도 이유 중 하나였을 거라 생각합니다.


퇴근하고 팀장님께 전화받는 상황, 짜증나시죠? 2017년부터 프랑스에서는 아예 법으로 퇴근 후 업무와 관련해서 연락하는 것을 법으로 막았습니다. 역시 선진국은 다르네! 싶으실 텐데 우리나라도 이 법의 도입을 논의 중입니다. 이른바 '연결되지 않을 권리'입니다.


연예인도 퇴근하면 연결되지 않을 권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무대가 끝난 뒤의 연예인 사생활을 우리가 아예 궁금해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기레기가 아무리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어도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기레기들은 더 이상 날파리 짓을 하지 않을 겁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올 겁니다. 안타까운 뉴스를 접할 일도 훨씬 줄어들 거고요.

팬심은 무대 위에 있을 때만 주고 콘텐츠를 열정적으로 소비해 주는 것으로 표현합시다. 이외에는 우리 자신에게 좀 더 집중하면 좋을 겁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 

이렇게 쓰면 너무 연예인에게 좋은 이야기만 해 주는 것 아니냐 하실 수 있는데... 사실은 연예인들에게 훨씬 더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연예인이 가진 이미지는 보통 자신들이 연기한 캐릭터에게서 가져옵니다. 대중들이 개인과 작품을 분리해서 본다면 현재 누리고 있는 엄청난 광고수익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른바 유명세, 셀럽으로서의 지위 역시 깎여 나가는 거죠.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vs 왕관 자체를 안 주면 안 무겁다' 랄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타인과 비교가 무의미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