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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딘닷 Feb 02. 2021

[딘닷의 남한유랑기 #4] 전라남도 완도 (4)-청산도

쥬라기공룡도 이긴 판소리의 진원지, 편지 보내면 1년 후 받는다는 그 섬

배가 청산도에 닿고 가장 먼저 내딛은 건 발이 아닌 바퀴였다.

차를 타고 항구를 나오자마자 우리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섬을 한바퀴 돌아보자는 지극히 단순한 계획을 세웠다. 이유는 애초에 이 섬에 관심을 갖게 만든 '서편제촬영지'로부터 시계반대방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2차선의 시골길은 좁지만 그래도 나름 잘 닦여 있었다.

청산로를 따라 나지막한 비탈길을 오르니 서편제 촬영지 입구 쪽에 주차장이 보였다. 친구 녀석이 차에서 내리더니 갑자기 왠 밀집모자를 꺼내 쓴다. 그 전까지는 없던 모자였다.

이게 왠 거냐고 물으니 청산도행 배에서 하나 샀다고 한다. (잔다고 해놓고 내가 갑판 위를 쏘다니던 사이에 차에서 나와 하나를 산 모양이었다...)


센스 없게 혼자서만 사냐고 놀리니 착한 친구(라고 쓰지만 나보다 나이 어린 동생)는 멋쩍게 웃으며 "그럴 줄 알았으면 2개 사는 건데..."라고 그걸 또 받아준다 ㅎㅎ


판소리로 풀어낸 '한'의 이야기: 서편제


그래도 밀레니얼 세대의 전반(?) 세대라면 비록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를 보지는 못했을지언정 적어도 한번 들어는 보았을 것이다. 서편제가 개봉한 1993년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쥬라기공원도 개봉했었는데 이와 겨룰 정도였다니 당시의 인기는 어마어마했었던 모양이다...


몰랐는데 판소리의 계보에도 '서편제' 말고 '동편제'도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지역에 따라 판소리의 스타일이 달랐다고 하는데,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편제, 서쪽은 서편제였다고 한다. 보통은 전라도가 그 중심이었는데 서편제가 그 중 기교가 가장 다양했다고 한다. 경기도/충청도 스타일은 '중고제'라 불렸지만 사실상 별 스타일은 없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출처: 판소리학회)

판소리 장인이 되려면 득음을 해야 하고, 득음을 하려면 '한'에 사무쳐야 한다.

실력을 쌓으려면 그 과정에서 좌충우돌 실패(아픈 경험)가 있을 수 밖에 없고, 결국 실력이 없으면 진정한 의미의 성공이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판소리와 인생이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부분도 있는 게 아닐까...


영화 <서편제>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스틸컷. 내가 그린 청산도의 의미지도 이런 길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청산도도 '슬로스티'로 어느 정도 관광 개발이 되면서, 영화와 같이 깡촌 시골길의 이미지는 벗었지만 벗지 않은듯 그 모습을 어렴풋이 간직하고 있었다.  

길옆에는 알록달록 들꽃이 피어있었다.

길을 오르며 오른편으로 바라보이는 나지막한 능선과 바다 그리고 다랭이 논밭의 모습이 참으로 평화롭기만 했다. 일제 치하, 625 전쟁 당시에 외딴섬 청산도는 지금처럼 한 없이 평온했었을까? 적어도 이 날은 그랬다.

왼쪽 사진을 보면 하트 모양이 눈에 띄는데, 처음엔 마을 사람들이 낭만을 아네...라고 생각했는데 나름의 계산하에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 '비밀의 문'은 뒤에서 열어드리겠다 ㅎ

언덕은 다랭이 논, 바다에는 양식장.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섬마을 사람들의 생계를 위한 터전이기도 했다.

봄이면 유채꽃이 노랗게 수놓아 한없이 더 아름다웠을 이 언덕...

출처: 전국맛집-사진여행 김동진

한여름에는 밭을 다 갈아 엎어서 조금 덜(?) 컬러풀했지만 뭔가 소가 금방 밭을 갈고 간 듯한 느낌이 들어 구수한 시골내음이 느껴졌다.

언덕길 왼쪽으로는 당락리 마을이 나타났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옥들의 지붕이 단조로웠을 자연이란 캔버스에 색채를 더해 주었다. 한국 여러 도시(마을)들을 다니며 느끼는 거지만 이런 지붕들의 색깔이 통일되었다면 더 예뻤을까? 생각해본다. 지금도 그리 나쁘진 않지만 기와 형태의 지붕에 색깔은 검정색만 있으면 좀 심심하니, 마을에서 한 가지 색을 정해서 통일하면 어떨까 싶기도...!?

이 날은 코로나 때문인지 북적거려야 민속 체험공간과 주막이 썰렁했다.

말끔하게 정리된 초가집이 사뭇 '슬로시티'라는 컨셉과도 꽤나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사실 이름을 왜 굳이 영어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국제인증?!이어서인듯 한데 그냥 '느린 마을' 정도가 더 구수하고 좋았을 지 싶기도 하다 ㅎㅎ)

서편제 촬영지를 지나 좀 더 걷다 보니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지가 나왔다. 이 드라마는 이름만 어렴풋 기억나고 그 외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싶었더니 무려 2006년(!) 작품이다.  

이제는 한껏 촌스러워진 머리 스타일... 무려 14년 전...!!

나름 가을동화, 겨울연가, 여름향기에 이은, 윤석호 감독의 계절 시리즈 완결편이라고 한다... (근데 내 기억속에선 완결이 안 된...)

모르긴 몰라도 전 3편보다는 흥행에 실패했거나 방영중에는 내가 더 이상 한국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그랬을런지도 모른다.. 사람들로 좀 더 북적였더라면 나의 이런 인식도 바뀌었을텐데 사람마저 없으니 나의 그런 생각은 더더욱 굳건(?)해졌다.

<봄의 왈츠> 배경이 된 집. 여기도 코로나로 입장할 수 없었다 ㅠ

촬영지 앞에는 '느림우체통'이 있었는데 그 이름값을 하듯, "편지는 1년후에 배달됩니다"라고...

'저걸로 수줍은 마음을 담아 고백 편지를 보내고 상대가 그걸 받을 즈음엔 이미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ㅎㅎㅎ

1초만에 메세지가 전달되는 요즘 같은 시대에 1년이란 너무도 먼 훗날의 얘기 같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 긴 시간이 더 의미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린 기술의 도움으로 스피드의 사치 속에서 매 순간의 또는 기술이 아껴주는 이 시간들에 대한 감사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아까 올라오면서 봤던 바다의 '하트 모양'은 결국 이 포토스팟을 위한 것이었다.

친구가 사진 찍는 재주는 좀 없어서 이런 애매한 구도의 사진이 되고 말았지만 원래는 저 프레임 안에 산, 들, 바다 그리고 핥트가 밸런스 좋게 들어가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뭐 다 좋다. 남정네 둘이 온 건데 낯뜨거운 바다의 하트 문양 따위 누가 신경 쓰겠는가.

커플끼리 왔어도 너무 적막해서 뻘쭘할 거 같은 산책이었지만 시골의 한적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도 이런 시기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생각은 몇 분 지나지 않아 증명이 됐다.

주차장 옆에 간이 화장실을 이용했는데 안에 이런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어제 갔었던 명사십리 해수욕장 사진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인산인해에 물반 사람반 이었을 해수욕장을 우린 전세 내고 썼었던 것이었다!

'공기 반 소리 반'이 아니라 '물 반 사람 반'


청산도에서 만난 터키 민박집 아주머니


땡볕에 좀 걸었더니 목이 타서 매점에서 음료도 사고, 햇볕 가릴 요량으로 나도 밀짚모자를 하나 사려고 했는데 매점이 닫혀 있었다. (방문객이 적으니 그냥 문을 안 여는 건지 아니면 그냥 '슬로시티' 답게 주인이 태평하게 유유자적하신 건지 알길은 없었다.)


마침 바로 맞은 편에 자그마한 식당 겸 카페가 있었다.

메인 메뉴는 '전복 라면'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지만 물회를 잔뜩 먹고 오기도 했고, 섬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다소 한정적이어서 (마지막 배편이 6시여서 5시반까지는 항구에 도착해야 했다. 참고로 이 때 시각이 4시 정도였다!) 청산도 유자차를 시켰다.

땟깔이 그리 영롱하진 않았는데, 청산도에서 재배하는 무농약 유자를 써서 그렇다나 어쨌다나... 맛은 무농약 맛(?)이었다 ㅎㅎㅎ

두건을 두른 아주머니는 차와 커피를 준비하면서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을 보고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이야기에 시동을 거셨다.

물론 붙임성 좋은(?) 내가 먼저 말은 붙이는 바람에 아주머니의 막혀있었던 수다 둑을 터뜨린 것도 있었다.

이런 조그맣고 조용한 섬에 어떤 연유로 오게 되었는지가 발단이었다. 원래 이곳 섬 출신이냐고 물으니 그렇진 않다고 하셨다. 남편분이 이쪽 섬 출신인데다 본인 건강도 좋지 않아 어찌저찌 이곳에서 살게 됐다고 하셨다.


그럼 그 전에는 어디서 사셨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전라도 내륙 어디를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무려 이역만리 터키 이스탄불에 계셨다고 한다..

그곳에서 한인 민박집을 운영하셨고 제법 장사도 잘 되었다고...

그런데 몇 년 전 테러 사건 등으로 터키 정세가 불안해 지면서 민박집을 제대로 정리도 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들어오게 되셨다고 했다. 그곳에서 겪었던 고생담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는데 이거 잘못하다간 여기서 반나절을 보내게 될 것 같아 슬슬 문을 나서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다른 손님분이 오셨다.


새 손님이 오시자 아주머니는 언제 그랬냐는듯 우리에게서 새 손님에게로 관심이 옮겨갔다.

이 때다 싶어 얼른(?) 작별 인사를 드리고 가게 문을 나섰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청산도라... 이런 작은 섬마을에서 이스탄불 출신 아주머니를 만났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얼떨떨하다.   

가는 길에 슬쩍 본 '고인돌 공원' 선사시대 때 이런 섬에도 인간이 살았었나보다..

뜬금 없지만 청산도 정중앙에 숭모사라는 절이 있어서 찾아가 보았는데 아주 조그마한 절이었다.

딱히 대단한 것도 없는 절이었는데 신풍리 마을 안에 위치한 것이 좀 재밌었다. (보통 절이라 하면 마을이랑은 떨어진 고즈넉한 곳에 있는데 말이다.)

돌담 시골길이 인상적이었다. 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수 있을만큼 좁은 길이 마을을 구비구비 가로지르고 있었다. 친구는 급하게 해결할 일이 있다며 전화통화를 하는 사이 나는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슬로시티 탐방로 길이 지나가는 마을이기도 한데 '느린 마을' 답게 정말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시간이 많으면 이런 민박집 어딘가에 적당히 묵으며 책도 읽고 신선놀음하는 것도 나름 힐링이 될 법해 보였다.


어렴풋이 옛날 시골 할아버지댁에 놀러온 거 같은 기분도 들었다.

슬로시티인만큼 '슬로'하게 돌아봤으면 좋으련만... 배편이 많지 않은 섬에서 여유 부리며 여행하는 것도 이 날의 우리에겐 사치였다. 다음 행선지인 '범바위'로 바퀴를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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