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시티에 타임어택으로 도전장을 내밀다
우리의 청산도 일주는 항구가 위치한 서쪽에서 시작했다.
서편제 촬영지를 시작으로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 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이었다.
적어도 카카오맵에 따르면 섬의 남쪽에 볼거리들이 많은 것으로 보였다.
닫혀서 보지는 못했지만 '부흥리'라는 작은 마을에 있었던 숭모사를 거쳐 '범바위'로 향했다. (사실 숭모사는 사찰이라기 보다는 가옥의 하나를 절의 용도로 쓰고 있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조용한 여름 섬마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게 오히려 포인트였다.
나무가 울창한 구불구불 산길을 차를 타고 올랐더니 조그마한 주차장이 나왔다.
청산도에 범바위가 생기게 된 데에는 나름의 전설이 있었다.
신선이 남쪽의 신성한 섬 '청산'에 10개의 영원한 생명(십장생)을 모으도록 범에게 명령했다. 해, 달, 산, 물, 돌, 소나무, 사슴, 학, 거북, 불로초 등 10개를 다 모은 범은 정작 자신이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사슴을 잡아먹고 자신이 섬에 스윽 하고 들어갔다. 이에 노한 신선이 달빛이 바다를 비추기 전에 섬을 떠나지 않으면 돌이 될 거라 했지만 끝내 섬이 좋았던 범은 남았고 돌이 되었다는 전설... 그래서 지금도 청산도에는 '사슴'이 없다고 한다ㅎㅎ
역시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른다. 그렇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그걸 알면서도 쉽게 떨쳐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범바위의 특이한 점은 바위가 자성(磁性)이 있는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나침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성이 강한 바위쪽으로 나침반의 바늘이 이동한다고...)
그래도 나름 청산도에서는 신성한 바위인지 소원을 빌기 위해 사람들이 쌓아놓은 조약돌 탑과 일종의 '제물(?)'처럼 사람들이 올려다 놓은 물병과 음식들이 있었다.
원래 우리 계획은 신흥해수욕장을 찍고 진산갯돌해변을 돌아 다시 항구로 돌아가는 거였다.
근데 중간에 들러 유자차를 마셨던 (무려 터키 민박집을 하시다 귀향한) 카페 주인 아주머니께 어디가 볼만하냐고 물어보니 '목섬새목아지'를 강추하셨다.
보통 여행지에 대한 정보가 없을 때는 현지 분께 물어보는 걸 좋아한다. 너무 관광화되지 않은 그 지방 고유의 별미, 절경 등을 소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섬에 내릴 때는 명색이 '슬로시티'인만큼 시골 섬마을을 아주 여유 있게 즐기자 였지만 막상 6시가 마지막 배편이고 우리가 섬에 도착한 게 3시경이었으니 '여유 있게' 즐기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꼴랑 3시간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일단 맵에 찍어보니 새목아지 포인트까지는 차로 들어갈 수 없고 도보로 찍고 와야하는 데, 편도로 10분이 걸린다고 되어 있어서 나의 계획은 이랬다.
왕복으로 20분이면 17:20이고 항구까지 돌아가는 데 20분이 걸리니 6시 출항 20분 전인 17:40까지 도착할 수 있겠다!
그렇게 친구와 함께 용감하게(?) 트래킹을 시작했다. 시작하자마자 울창한 숲길이 나지막한 오르막으로 계속됐다.
결국 '새목아지'처럼 불뚝 튀어나온 이 반도 모양의 목섬은 울창한 숲이었고 이걸 다 가로질러야 '새목아지'의 절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친구는 중간에 업무 전화가 오는 바람에 발걸음이 늦어졌고, 17시반까지 항구에 도착하기에는 타이트한 시간으로 마음이 급했던 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 지점이 됐을 때 내 친구와 나의 거리는 꽤 벌어졌고 나를 제대로 따라오지 못한 채 아래로 난 길로 갔고 사실상 거긴 막다른 길이었다.
그리고 나는 위로 난 길을 택해서 계속 걷기 시작했다. 어찌나 나무가 빽빽하던지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그나마 화창한 날이어서 이 정도의 빛이 들어왔지 조금이라도 흐린 날에는 엄청 어두컴컴하고 무서울 거 같았다. 친구가 뒤에서 잘 따라오나 불러보기도 했지만 답이 없었다. 트래킹 코스를 걸으면서도 계속해서 맞는 길로 가고 있는지, 혹시나 깊숙이 들어갔는데 나오는 데까지 시간이 부족하진 않을런지 수시로 체크하면서 걸었다. 게다가 낯선 장소, 어둠, 시간 그리고 고독과 싸우면서 걷는 이 트래킹의 쫄깃함이란 '슬로시티'라는 슬로건과 너무도 상반되는 경험이었다.
이런 길이 얼마나 이어질지, 맵에서 보여준 예상도착시간이 맞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중간에 되돌아서 나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중간까지 기왕 들어온 거 그놈의 '새목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더 궁금해졌다. 갑자기 '타임어택' 챌린지에 임하게 된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빽빽한 정글숲은 내 마음을 초조하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 혼자 그야말로 the 자연 속으로 들어왔다는 해방감도 주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을 '여유 있게' 맞이했다면 더 무서웠을 수도 있었겠지만 눈 앞의 목표만을 바라보고 갔기 때문에 두려움 같은 감정을 느낄 여유 조차 없었다 ㅎㅎ
전파도 잘 안 통하지만 맵의 방향에 의지해 계속해서 나아갔다. 헨젤과 그레텔에나 나올법한 고즈넉하지만 깊숙히 이어지는 숲길은 정말 평화로웠다. 게다가 화창한 날씨 덕분에 녹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중간중간 오르막의 경사가 가팔라지기도 하고 길이 구불구불 해지기도 하고 갈림길도 나왔지만 방향을 잃지 않고 걸으니 바다가 보였다. 거의 목적지가 가까웠다는 표시였다.
사람들의 발길이 많은 곳은 확실히 아닌 것처럼 보였다. 가는 길 위로는 나뭇가지가 있어서 잘못하다가는 얼굴이 찔릴 수도 있었고 거미줄도 잘 피해가야 했다.
급한 마음으로 여기까지 빠른 발걸음으로 오다 보니 이미 등에는 땀이 주륵주륵 흐르고 있었다.
저 멀리 새목아지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와우! I made it!!
시계를 보니 17:12. 입구에서부터 12분만에 주파한 것이다. 잘만 돌아가면 원래 계획했던 17:20 언저리까지 도착할 수 있겠지?!
시간이 많지는 않았지만 1~2분의 사치(?)를 부려 보았다.
이 절경을 보러 여기까지 고생해서 왔는데 휙 보고 돌아가기엔 너무 아까웠던 것이다.
시간 여유만 있었다면 저 끄트머리까지 가고 싶었지만 그건 정말이지 욕심이었다.
서툴게 욕심 부렸다가는 '범바위 전설'의 호랑이가 돌이 되어 버렸듯 완도로 돌아갈 배를 놓치게 되기 때문에 잘 참고 발길을 돌렸다.
그래도 한번 와봤던 길을 돌아가는 것이었어서 그런지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내리막이어서 부담도 덜했다. 그렇게 무슨 방탈출 내지는 미로 탈출이라도 되듯 어두운 숲길을 빠르게 헤쳐서 나왔다.
친구는 트래킹 입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전화 통화를 하며 나를 따라오고 있었는데 통화에 정신이 팔려 다른 길로 접어들었고 내가 안 보이자 더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나왔다고 했다.
여튼 청산도의 절경이라는 '새목아지'를 타임어택(?)하는 데 성공했다.
이게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이제는 '슬로시티'라는 이름에 미안하지만 '서둘러서' 항구로 향하기로 했다.
원래 여행할 때 한번 왔던 길보다는 새로운 길을 택하는 걸 선호해서 청산도 일주를 완성하기 위해 북쪽 길을 택하고 싶었지만 그쪽 길은 돌아가는 데다 길도 덜 닦여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섬을 가로질러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여유 있게(?) 17:40까지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고 무사히 티케팅+승선할 수 있었다.
청산도 주변에서는 김양식장으로 추정되는 양식장들이 많이 보였다.
저 멀리 우리가 돌아오려고 했던 청산도 북쪽의 산들이 보인다.
항상 여행을 하면서 지나가지 못했던 길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기가 택하지 못한 길에 대한 호기심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중히 결정하되 한번 결정하면 최대한 후회하지 않도록 선택한 길을 열심히 걸어야 한다. 그리고 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문득 Robert Frost의 <The Road Not Taken>이란 시가 떠올라서 인용해 본다.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
I took the one less travel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Robert Frost
시에서도 두 갈래의 길을 모두 선택할 수 없었음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이 덜 가는 길'이 자신의 인생을 바꿔 놓았음을 얘기하는 구절(밑줄 친 부분)이 특히 와닿았다.
여행이 좋은 이유는 한정된 시간동안 압축되게 경험하는 인생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다.
현대인의 삶은 그래도 많이 안정적이지만 옛날옛적 수렵인들의 삶은 그야말로 여행처럼 하루하루가 모험이었을 터이니 말이다.
청산도를 빠져나오면서 눈으로 들어오는 경치들이 아름다웠다.
완도타워가 보이는 걸 보니 완도항구에 다 왔나보다.
태양, 바다, 하늘, 구름, 산, 섬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완도 도착 후,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통일신라 시절 장보고 활약의 무대가 되었던 '청해진 유적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