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한류의 전초기지(?), 청해진
이날 밤은 장흥에 있는 고택에서 묵기로 했다.
일본을 여행하면서 자주 느꼈던 점은 한국말로 하면 '여관'에 해당하는 '료칸'이 많이 있고 대부분 전통 가옥 형태라는 점이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일본이 빨리 근대화되면서 일반인들도 여행을 가는 문화가 빨리 정착했기 때문일 테지만 지금도 호텔보다는 온천이 딸린 료칸에서 묵는 것을 즐겨 한다는 점이었다.
나도 일본의 이세 반도에 위치한 100년이 넘은 료칸에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굉장히 낡았지만 100년 전 이곳에 머물렀을 나그네와 같은 방을 쓴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었던 게 떠오른다.
여튼 한국에서는 일제 치하며, 한국전쟁으로 온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그 이후에도 한옥보다는 양옥이 '쿨'한 것으로 여겨져 많이 철거해서 딱히 유서 깊은 전통 가옥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게 아까웠다. 최근에서야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과 고찰이 생기면서 겉모습은 최대한 남겨두되 인테리어를 리노베이션하는 쪽으로 바뀌면서 이런 전통 가옥 민박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참 반가운 일이다.
여튼 서론이 길었다. 그래서 9시 전까지는 장흥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해 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보기로 한 곳이 바로 청해진이다.
요즘 말로 생각해 보면 '신라방'은 신라인들이 밀집해 살았던 곳 즉 일종의 '코리아타운'인 셈인데 결국 여기에 진출해 사는 사람들은 무역 회사(상사)의 주재원 정도였을 것이다. 장보고 시절에 이런 해상 무역이 활발했다고 하는데 청해진이 이 모든 해상 활동의 중심이 되는 본거지였으니 프랜차이즈 또는 상사의 본사 정도가 되는 곳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만 들었던 청해진에 도착! 다행히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청해진은 후기신라 흥덕왕 3년 (828년) 장보고가 만든 진지로서, 원래는 해적에 대한 방비 차원에서 지어진 군사거점이었으나 이후 해상 치안이 안정화되면서 무역 거점으로 번성하였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청해진유적은 장도라는 섬에 위치해 있어서 길다란 다리를 건너 가야 했다. 이 섬의 언덕에서 해적이 출몰하는지 지켜보다가 나타나면 포도 쏘고 배도 출동시키면서 주변 항구를 지키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평소 같았으면 사람들로 엄청 북적댔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날만큼은 한적했다.
마치 한때 번성했었지만 지금은 일개 공원으로 변해버린 청해진의 모습을 대변이라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보고는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위업을 이뤄냈지만 결국 정치에 대한 야욕으로 왕권에 개입하게 되고 결국 조정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을 당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박정희가 아닐까 싶다. 군인으로서 입지를 다지고 경제를 부흥시키고 대권을 노렸다는 점, 게다가 결국엔 암살되었다는 점이 그렇다.
항상 높은 곳에 갈 수록 더 겸손해져야 하는 법인데 대부분의 인간은 별 수 없나 보다. 그렇기에 높은 곳에서도 청렴, 겸손하게 지낸 사람들을 더더욱 존경하게 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나도 나이를 먹을수록 그 어려움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유적지 발굴/복원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그냥 말 그대로 터만 있는 섬이었는데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 작업 덕분에 그래도 주요 건물들이라도 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를 가보아도 종종 옛 건물들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는 곳을 보게 된다. 대표적인 곳이 경주의 황룡사라든지, 일본 도쿄의 에도성이 있던 자리라든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복원이 쉽지는 않다. 이미 그 자리에 도로라다느지 건물이 올라가서 도저히 허물고 지을 수는 없다던가 복원을 하기 위한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인 경우가 많다.
나는 유적지 여행을 가서 옛날 모습을 떠올려 보는 걸 좋아한다. 거기에 남아 있는 건물들을 보며 한 때 군인들과 상인들로 북적 거렸을 청해진을 떠올려 본다. 물론 터만 있어도 상상이야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남아있는(또는 복원된) 건물들이 상상의 단초가 되어 주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발굴/복원 작업이 감사하다.
잠깐 옆으로 새긴 하지만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웹사이트가 있다. 디자이너스파티 라는 커뮤니티인데 한국의 근현대 사진을 (대체 어디서 구하는지는 몰라도) 많이 올려놨다. 참으로 재밌다. 특히 옛날 서울의 모습을 보며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공간들의 30년 전, 50년 전, 100년 전 모습을 알게 되니 다시 지나가게 될 때의 감회가 새롭다.
살짝 돌아 들어가면 외성문이 보인다.
외성문을 지나면 길이 두 갈래로 나눠지는데 결국 어느쪽으로 가도 다음 관문인 내성문을 지나야 한다.
나는 오른쪽 길을 택해서 천천히 올라가 보았다. 경사가 그리 가팔라 보이지 않았지만 막상 오르기 시작하니 보기 보다 경사가 있었다.
어느 정도 언덕을 올라 뒤를 돌아보니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마치 강처럼 보이는 바다. 겹겹이 포개져 보이는 능선과 그 뒤로 뉘역뉘역 지고 있는 석양.
내 기억 속에 오래 남는 경치에 들어가는 모든 요소가 들어 있었다. 내가 홍콩을 좋아하는 이유는 구룡반도에서 홍콩섬을 바라보면 딱 이 뷰와 같이 강처럼 보이는 해협과 그 너머로 마천루와 산이 모두 보여지기 때문이다.
저 멀리 장보고기념관에 있는 장보고의 거대한 동상도 보인다.
외성문과 같이 내성문 위에는 누각이 있어서 올라가 볼 수 있었다.
지금은 그저 공터가 되어 있었지만 예전에는 이 공간들로 건물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을까 상상해 본다. 처음 지어질 때는 공터였겠지만 경제적 요충지가 됨에 따라 여러 건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겼을 거 같다는 새각을 해 본다. 그래도 이 조그만 섬에 1만의 군사들이 머물렀었다고 하니 그들이 잠을 자는 등 생활 공간도 필요할테니 꽤나 빡빡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처음에는 해적 출몰을 망보는 역할을 했을 이 곳도 점차 권세가들이 멋진 경치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는 누각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넋놓고 고요한 산과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렇게 마음이 평온해 질 수가 없었다.
내성문의 오른쪽으로는 '고대'라고 불리는 망루가 있었다. 해적 감시를 통해 무역선이나 어선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누각이어서 왠지 지휘관들이 머무르며 밤에 달빛을 보며 술잔을 기울이는 곳이었지 않을까 했었는데 나의 생각이 너무 타락해 있었다. ㅎㅎㅎ
해가 지기 시작하니 누각 안이 어둑어둑하다. 옛날 옛적 전기도 없던 시절에 달빛 마저 없으면 정말 아무 것도 안 보였을 거 같다.
당연히 불을 써서 어둠을 밝혔을텐데 잘못했다간 건물 다 태워먹게 생겼으니... 해적만 감시할 게 아니라 불조심도 해야 했을 거 같다. (보초 서는 병사가 이거 태워먹으면 목숨도 날아갔을듯...ㅠ)
그렇게 진지의 흙벽을 따라 걸어 보았다.
아마 해적들이 주로 출몰한 것은 마을로부터 떨어진 이쪽 바다가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은 주로 양식장으로 쓰이고 있었던 듯 하다.
섬의 중앙에는 예전에 행정 건물(본청)로 쓰였던 듯한 곳의 터만이 남아 있었고 그 옆에는 조그마한 사당이 남아 있었다. 신성한 공간이기 때문인 걸까. 유독 이 사당만은 복원되어 있었다.
이 때가 7시반(!)이었다. 해도 거의 다 넘어갔고 장흥 숙소에 도착하기 전에 저녁식사도 해결해야 해서 빠져 나오기로 했다.
배가 고파 끼니를 해결할 저녁식사 장소를 찾아봤는데 이 근처 맛집들은 죄다 8시 전에 마지막 손님을 받는다고 해서... 아이고 큰일났다.. 우리 저녁 어디서 먹누... 걱정하며 일단 완도 근처에서 식사하기는 글렀다고 생각해 포기하고 무작정 장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