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죽음은 부재가 아니라 존재로써 남은 이들에게 영향을 준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현장을 찾았을 때였다. 때마침 ‘김 군’ 어머니의 기자회견이 있던 날이었다. 김 군의 어머니는 경직된 얼굴로 미리 준비해 온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얼마 못 가 울기 시작했는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면서도 ‘뒤통수’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말했다.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김 군의 뒤통수’에는 커다란 상처가 남았다. 그 상처는 노동자를 제외한 모든 인간을 보호하는 스크린도어와 노동자를 끊임없이 실어 나르기 위해 절대 멈추지 않는 열차가 만들어낸 비인간적인 흔적일 것이었다. 그리고 김 군의 어머니는 평생 그 상처를 실재하는 것처럼 눈에 담고 살아야 할지 모른다.
김 군의 친구와 동료들이 여전히 비슷한 환경 하에서 위험하게 일하는 현실 때문이다. 이 현실에서 아예 고개를 돌리지 않고서야 김 군의 뒤통수는 지하철, 편의점, 고등학교 등 곳곳에서 눈에 밟힐 것이다. 누구도 내 자식과 같은 죽음을 맞지 않도록 하겠다는 부모의 다짐은 따라서 자기 헌신적이면서 동시에 자기 보호적이다.
이처럼 가족의 죽음은 남은 이들의 눈에 비친 세상을 바꾸기에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영화 <라우더댄밤즈>에서 이자벨(이자벨 위페르)의 죽음을 가족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고인지 자살인지. 죽기 전에 누구에게 의지하고 누구를 원망했는지 하는 질문은 죽음이 아니라 남은 이의 삶에 관한 질문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도 비슷한 장치를 마주한다. 이 영화에서는 가족의 죽음이 어린 소년 ‘파이 파텔(수라즈 샤르마)’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상상력을 보태어 보여준다. 파이는 표류 중인 구명정에서 어머니가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그 살인자를 자신이 다시 보복살인 한다. 그러나 그 끔찍한 기억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마치 이솝 우화처럼 살인자와 어머니를 동물로 대체하여 기억한다.
파이가 각색한 어머니의 죽음은 단편적인 과거에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보다 과거의 삶을 기억하는 방식은 물론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방식도 변화시킨다. 당연한 일이다. 기억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인간의 사고를 관통하며 일단 한 번 머릿속에 자리 잡으면 헤어 나오기 어렵다.
뉴스타파의 다큐멘터리 <자백>의 이철이 그랬다. 그는 1975년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1975년 학원침투간첩단 사건의 피해자다. 모진 고문 속에 죽으려고 혀를 깨물었지만 질긴 혀가 끊어지지가 않았다. 결국 거짓자백 속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 충격으로 1년 만에 아버지를, 3년 만에 어머니를 잃고 만다.
이철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53세가 되자 죄스러운 마음이 더 커졌다. 돌아가신 어머니보다 오래 살게 된 56세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결국 2015년에 재심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당시 그를 수사했던 대공수사국장이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가혹한 현실은 변함이 없다. 결국 53세의 아버지와 56세의 어머니는 그의 눈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지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유가족들이 어째서 ‘재발 방지’를 외치느냐고. 소중한 내 가족의 죽음을 수습하는데 여념이 없어야 솔직하고 인간적인 것인데, 유가족들이 끝끝내 재발 방지와 구조 개선을 외치는 것은 정치인들에게 ‘선동’되었기 때문 아니냐고 말이다. 그 때는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다시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위의 영화들을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