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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인칭 Jul 30. 2016

#3. <우리들> 놀자, '우리들'만 남을 때까지...

‘개돼지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냐항욱 교육부 전 정책기획관은 기자가 “(구의역 사고 희생자가)내 자식이라고 생각해 봐라. 사회가 안 변하면 내 자식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거다.”고 지적하자, “그게 어떻게 자기(내) 자식 일처럼 생각이 되나.”고 대꾸했다. 교육 정책을 담당하는 이의 공동체 인식 속에서 우리 교육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엿볼 수 있다. 너와 나의 엄격한 구분, 그리고 ‘우리’라는 표현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다분히 배타성을 띄는 표현이다. 단순히 어떤 범주를 아우를 때도 쓰이지만, ‘내’가 속한 무리를 ‘너’와 격리시키고자 할 때도 쓰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공동체가 처참하게 붕괴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라는 표현은 입에 붙어 있다. 이를 구성원 간의 신뢰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주류 사회에서 격리되어 너라는 타자로 전락하기 싫다는 불안감의 표현에 가깝다. 


영화 <우리들> 포스터  ⓒ엣나인필름


영화 <우리들>에는 그런 불안감이 잔뜩 담겨있다. 아이들은 서로에게 잔인하게 폭력을 휘두르면서까지 주류에 남고자 발버둥을 친다. 주류에서 밀려나 너로 전락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고 그저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우리들’은 아이들이되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우리’라는 폭력을 그대로 대물림한 어른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아무리 작은 싸움에도 생과 정체성을 건다.


‘선’(최수인)은 친구가 없다. 학급의 주류인 보라(이서연)가 선이를 따돌리도록 친구들을 부추기는 탓이다. 선이는 어떻게든 보라와 친해지고 싶지만 보라는 그럴수록 잔인하게 선이를 따돌린다. 방학이 시작하는 날. 보라는 생일파티에 초대하는 조건으로 선이에게 청소를 대신 시킨다. 그러나 청소를 끝낸 선이 선물을 들고 찾아간 집에 보라는 없었다. 일부러 틀리게 가르쳐 준 것이다. 보라가 있는 한 선이는 결코 ‘우리’도 ‘나’도 될 수 없고, 그저 타자화 되어 따돌림 당하는 ‘너’일 뿐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방학은 마술 같은 시간이다. 그저 학교엘 나가지 않는 것뿐인데 오히려 방학 동안 부쩍 더 키가 크고 생각도 깊어지는 아이들이 종종 있다. 선이도 마찬가지다. 선이는 방학이 시작하는 날 전학 온 지아(설혜인)를 우연히 만나 친해진다. 지아는 보라가 지배하는 교실에서 벗어나 더 이상 ‘너’가 아닌 선이에게 호감을 느낀다.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 마음껏 함께 놀고 선물도 건넬 수 있는 ‘선’도 이제 우리들이 될 수 있다.


영화 <우리들> 스틸컷. 왼쪽부터 선(최수인), 지아(설혜인), 윤(강민준)  ⓒ 엣나인필름


보라가 이를 그냥 둘 리가 없다. 보라는 단지 선과 친해지기 싫은 것만이 아니라 선이가 홀로 남기를 원한다. 보라는 적극적으로 지아를 부추겨 선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보라를 비롯한 아이들은 어째서 무리 짓고 도태시키고 주도권을 빼앗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것일까. 인간이란 원래 그런 것일까? 아니다. 어른들이 결코 사회와 동떨어져 저 홀로 삶을 설계할 수 없듯 아이들의 집단의식도 사회적인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한국 사회는 명실상부 경쟁 사회다. 영화 <우리들>도 아이들이 학업에 받는 스트레스와 경쟁 사회를 조명한다. 그러나 여기에 모든 원인을 돌리는 대신 복합적 문제를 지적한다. 선이는 공부를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기보다는 비싼 학원비에 더 스트레스를 받는 아이다. 선이가 시험 성적이 떨어지면 문제아의 낙인을 찍는 대신 어디 문제라도 있는 것 아닌가 진지하게 걱정해주는 어머니 덕분이다. 


영화 <우리들> 스틸컷. 보라를 중심으로 한 '우리들'은 선에게 경계의 시선을 풀지 않는다.  ⓒ 엣나인필름

    

문제는 경쟁 사회의 유탄이 선이를 때린다는 것이다. 선이를 괴롭히는 장본인인 보라는 남에게 뒤지는 것을 못 참는 성격이다. 한창 친하게 지내던 지아에게 성적에서 밀리자 따돌리기 시작할 정도다. 보라가 친했던 선이를 괴롭히기 시작한 이유도 같다. 힘을 합쳐 적을 억눌러야 하는데 선이는 ‘착한 척’만 한다. 경쟁을 이해 못하고 착한 척만 하는 선이는 상대를 이기는데 도움이 안 될뿐더러 오히려 보라의 상대적인 악성을 고발하는 위협요소다.


보라가 선이를 성공적으로 고립시킬 수 있었던 것도 다른 아이들의 경쟁 심리를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방학 동안 같은 학원엘 다니던 보라가 어떤 방법으로 지아와 선이를 갈라놓았을지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선이에게 친구가 없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고’ 그걸 알고도 함께 놀면 덩달아 따돌림을 받을 거라고 경고했을 것이다. ‘착한’ 선이와 ‘아픈’ 지아의 관계는 무력하게 틀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피구는 아이들의 경쟁심이 극대화되는 장이다. 체육 시간 아이들의 놀이에 ‘심판’은 없다. 선을 넘었는지 공에 맞았는지 결정하는 것은 다수의 목소리다. 따라서 경쟁 관계에서 도태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선이는 선을 밟지 않아도 게임에서 ‘아웃’당하고 안팎으로 오가는 아이들의 패스에 고립되다가 무력하게 공을 맞기도 한다. 이는 관계망 속에서 고립되다가 결국 아예 선 밖으로 밀려나는 선의 학교생활과 닮아있다.


이처럼 경쟁사회의 부작용은 난반사하며 온 사방에 존재하는 ‘우리들’에게 상처 입힌다. 그러나 성인 사회는 직접적인 성적 스트레스에 몸부림치는 아이들의 상처에만 집중한다. 그 이외의 아이들 간의 다툼은 그저 사회화하며 거쳐야 할 통과 의례 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선이와 지아, 보라를 생각해 보자. 그게 아니면 우리의 어린 시절이라도 떠올려보자. 상처받지 않는 싸움은 없다. 아무리 작은 싸움도 생과 정체성을 걸고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럼 언제 놀아?


‘학원 가기 싫은 날’ 이라는 시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일이 있다. 학원 가기를 강요하는 어머니에게 잔인한 행동을 하는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문학적인 측면, 그러니까 시어의 과감성이나 선정성 그 자체에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선과 동갑으로 열한 살에 불과한 저자가 순진한 겉모습과 달리 잔인한 속내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외로움, 두려움, 그리움, 사랑을 모르겠는가. 혹독한 경쟁을 체화하고 그 잔인함을 몸소 겪고 있는데. 아이들에게도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대신 표출해 줄 페르소나가 있고 시상이 필요하다. 이기기 위해 정치를 하거나 도태의 아픔을 삶의 태도로 그대로 내재화시키기도 하고 그도 아니면 체념을 한다. 단지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감당할 수 있는 아픔만 겪고 사는 것처럼 믿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럼 언제 놀아? 윤이의 천연덕스러운 질문은 본질을 짚는다. ⓒ 엣나인필름

아이들이 겪는 고통은 생각처럼 가볍지 않다.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너’로 타자화 하고 어른에게는 휘두르지 못할 폭력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또한 구조적 고통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발견해도 ‘다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라고 비겁하게 방치한다. 어려움을 말하며 구조를 요청하는 아이들에게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통박을 놓는다거나 심지어 아예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말을 협박처럼 외기까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결국 <우리들>은 어른이 만든 구조 아래서 고통 받는 ‘우리들’에 관한 영화이자, 그 구조를 만들어놓고도 인지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향한 영화다. 영화는 우리라는 표현을 포용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아우르는 것이다. 소위 ‘다 그럴 이유가 있어서’ 격리되는 모든 소수자들을 내몰지 않는 것이다. “그럼 언제 놀아?”라고 되물었던 윤(강민준)의 말처럼 아무리 싸우고 상처 입더라도 우리 밖에 무엇도 남지 않게 모두 아우르고 어울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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