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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인칭 Aug 13. 2016

영화 <걸어도걸어도> 리뷰

걸어도 걸어도 이어지는 핏줄의 굴레


핏줄. 이 비릿하고 끈끈한 줄을 죽자 사자 붙잡고 이어져온 것이 ‘가족’이다. 핏줄에 대한 집착이 근거 없는 맹신은 아니었다. 전통 사회의 보호와 혜택이 모두 이 줄 위에서 차등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귀족의 아들은 귀족으로 나고 자랐고 ‘백정’의 아들은 백정의 삶을 이어받았으며 모두가 그 ‘본분’을 지키고자 했다. 줄을 타고 더 높은 곳으로 오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기 때문이었다. 흡사 외줄타기처럼 말이다.


영화 <걸어도걸어도>에서 은퇴한 의사 쿄헤이(하라다 요시오)는 전통적인 관점의 가족에 집착한다. 그는 자식들이 ‘의사’를 가업으로 이어주기 바란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기대했던 장남 준페이는 바다에 빠진 꼬마를 구하다 일찍 죽고, 어렸을 때 의사가 되기를 꿈꿨던 차남 료타(아베 히로시)는 유화복원사가 된다. 쿄헤이는 준페이에게 가졌던 바람을 료타에게 억지로 강요하다가 마침내 부자 관계마저 틀어진다.


영화 <걸어도걸어도> 스틸컷. 토시코(좌)는 핏줄에 대한 집착이 누구보다 크다. ⓒ 시네콰논


전통적인 의미의 핏줄 잇기에 집착하는 것은 쿄헤이만이 아니다. 그의 아내 토시코(키키 키린)의 집착은 남편보다 무섭고 은밀하다. 그녀는 료타와 재혼한 유카리(나츠카와 유이)를 ‘중고’라며 폄하한다. 두 사람이 아이를 낳으면 헤어질 수 없으니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자식들에게 물려줄 ‘가업’이 없는 그녀는 핏줄의 순수성을 더욱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핏줄에 대한 두 사람의 집착을 가장 강하게 드러낸 것은 이시다 아유미의 노래 <블루나이트 요코하마>의 노랫말이다. 젊은 시절 토시코는 바람을 피우는 쿄헤이를 찾아 도쿄의 한 아파트에 간 일이 있다. 거기서 토시코는 평생 근엄하기만 할 것 같았던 쿄헤이가 ‘걸어도 걸어도~’ 라고 간드러지게 노래하는 것을 듣는다. 결국 토시코는 끝내 문을 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며 역 앞에서 <블루나이트 요코하마>의 레코드판을 산다.


토시코는 그 이후 평생 남몰래 노래를 들으며 그 치 떨리는 배신의 현장을 홀로 곱씹지만 따지고 들 생각은 하지 않는다. 쿄헤이를 중심으로 한 비릿하고 끈끈한 ‘핏줄’에서 벗어나면, 아득한 창공에서 뚝 떨어져 산산조각 나는 육체 말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이 ‘여자의 삶’이기 때문이다. 쿄헤이도 마찬가지다.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자신이 ‘가장’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핏줄을 잘라버리는 대신 ‘적당히 즐길 만큼 즐기고’ 가정으로 돌아온다.


<블루나이트 요코하마>의 원곡 가사에는 ‘걸어도 걸어도 나는 당신의 품속. 둘만의 세계는 언제까지.’라는 대목이 있다. 이 달콤한 원곡이 토시코와 쿄헤이에게 이르러서는 걸어도 걸어도 헤어 나올 수 없고,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가족의 굴레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뀐다. 문 뒤에서 남편의 외도를 감내하고 ‘남편이 산 집’ 한 구석에서 남몰래 블루나이트 요코하마를 들었던 토시코의 세월을, 그의 아들 료타는 ‘오싹하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가족의 굴레 안에서 인내하는 세월이 노랫말처럼 ‘언제까지고 계속되어야’ 한다면 오싹한 게 아니라 서글프고 잔인한 일이다.


가족은 잇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스며드는 것이다


‘전통의 가족’을 변화시키는 것은 료타의 의붓아들 아츠시(다나카 쇼헤이)다. 핏줄 하나 섞이지 않은 그는 쿄헤이와 토시코가 생각하는 가족이 될 수 없다. 스스로도 료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대신 ‘료짱’이라고 부르며 거리를 둔다. 그에게 아버지는 여전히 피아노 조율사를 하다 죽은 남자뿐이다. 아츠시가 ‘전통적인 가족’을 고수하기 때문이라기보다 가족이란 무엇인지 고민해 본 적도 없이 아버지를 잃고 상실감에 잠겼기 때문이다. 


이제 막 가족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 아츠시에게 핏줄에 대한 집착은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토시코가 홀린 듯 나비를 따라다니는 모습은 기이하다. 토시코는 조명을 따라 집안으로 스며든 나비를 보고 ‘준페이가 무덤에서 따라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은 토끼에게 편지를 보내는 행위마저 우스워하는 아츠시에게 죽어서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이 나비가 되었다며 쫓아다니는 토시코의 행동은 어떤 의미일까.


영화 <걸어도걸어도> 스틸컷.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가는 료타와 아츠시 ⓒ시네콰논


아츠시는 토시코의 기이한 열정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다. 죽은 아버지의 육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아츠시의 가슴 속에 그 존재감만은 선연하다. 그에게 가족이란 가업이나 핏줄을 바통처럼 ‘이어주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가슴 속에 스며들어 설령 상대가 죽어도 지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할머니 토시코는 ‘핏줄’에 대한 집착만이 아니라, 가슴 속에 스며든 아들 준페이의 팔랑거리는 존재감을 쫓은 것이다. 


아츠시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커서 피아노 조율사가 되겠다고, 그게 아니면 의사가 되겠다고 죽은 아버지에게 말한다. 이는 죽은 아버지와 새 아버지 료타를 가만히 가슴 속에 되새기는 행위다. 두 직업 중 하나, 아니 어쩌면 둘 모두를 포기하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가업이나 핏줄 자체를 잇는 것이 아니라 죽은 아버지와 료타를 가슴 속에 새기며 서서히 스며들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겨울 살아남은 하얀 나비처럼


더디지만 확실하게, 료타도 깨달음을 얻는다. 료타는 어렸을 때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고 글짓기를 한 적이 있다. 가족들이 글을 꺼내놓고 읽으며 신기해하자 료타는 그걸 신경질적으로 구겨버린다. 료타가 한 때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고자 했다는 사실은 핏줄에 대한 아버지의 집착을 생각 없이 따랐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할 뿐 아니라, 그 가느다란 줄 위에서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버린 현재의 비참함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비참함이 남은 까닭은 료타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함께 살자는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죽어도 나는 형이 될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형에게 건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그러니까 ‘핏줄을 잇지 못하면’ 가족 관계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좀처럼 잘 풀리지 않는 ‘유화 복원사’일은 아버지에게도 그에게도 성이 차지 않는다.


영화 <걸어도걸어도> 스틸컷. 부자에게 중요한 것은 축구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약속 그 자체다. ⓒ시네콰논

료타의 생각이 바뀌는 것도 아츠시 때문이다. 그는 의붓아들 아츠시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아버지 쿄헤이가 자신에게 가한 강요와 핏줄에 대한 강박을 물려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요와 집착이 없어도 서서히 제 안에 스며드는 아츠시를 보며 료타는 아버지 쿄헤이와 자신의 관계도 같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료타는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고 싶다.’고 쓴 종이를 다시 펴고 찢어진 부분을 테이프로 붙인다.


가족들의 이런 깨달음과 이해는 그들의 삶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스모 선수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애쓰다가 결국 각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야 떠올리듯이 ‘꼭 한 발씩 늦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것은 적재적소에 바통을 이어받아야 하는 ‘이어달리기’ 같은 것이 아니다. 하고픈 말 다 건네지 못해도, 지난겨울 살아남은 하얀 나비가 노랑나비를 펄럭이며 내 가슴 한편에 스며들어 있다는 믿음이면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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