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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인칭 Sep 22. 2016

정체성에 관한 영화<늑대아이> 리뷰


늑대는 죽어야 한다.


늑대가 죽었다. 영화 <늑대아이>에서 인간과 늑대의 자식으로 태어난 늑대 아이 ‘아메’는 동화책을 보기가 두렵다. 동화책에 등장하는 늑대는 천편일률인 ‘악당’으로 등장하고, 사람들은 힘을 합쳐 끝내 늑대를 죽이고야 만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늑대로도 인간으로도 외형을 바꿀 수가 있지만, 내면의 정체성만은 그렇게 쉽게 바꿀 수가 없다. 늑대의 정체성이 더 강고하게 자리 잡은 아메는 늑대에게 적의를 품은 인간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다.


아메의 누나 유키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정체성이 더 강하게 자리 잡은 그녀는 인간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제 안의 늑대를 억누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동물의 뼈 따위를 모으고, 손목에 뱀을 감고 노는 유키는 아무리 봐도 또래 친구들과 다르다. 유키는 제 안의 늑대만을 철저히 억누르려하지만 그 또한 유키이기 때문에, 정체성이 위축되고 상처 입는 것만은 막을 수는 없다.


늑대아이 스틸컷. '유키'는 정체성을 숨겨가며 학교 생활을 한다. ⓒ 도호


그래도 남매가 온전히 선택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 ‘하나’의 노력 때문이다. 그녀는 늑대인간인 남편이 사고로 죽고 홀로 두 ‘늑대 아이’를 키운다. 하나가 늑대 인간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은 ‘절대 남들에게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다. 한 때 ‘일족’을 이룰 만큼 번성했던 늑대 인간이 하나의 남편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늑대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 터전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도시는 최악의 장소다. 다닥다닥 붙어서 살아가는 도시 사람들은 늑대 아이들의 요란한 울음소리를 견뎌줄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게다가 저간의 사정을 알 리 없는 공무원들은 하나가 늑대 아이들에게 ‘인간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자 찾아와서 감시하려 든다. 그대로 도시에 남았다가는 아이들의 정체가 밝혀지거나 최소한 양육권을 빼앗겨 강제로  ‘인간의 아이’로 키워지는 수밖에 없다.

영화 <늑대아이> 스틸컷. 늑대아이를 몰래 키우는 일은 쉽지 않다. ⓒ 도호



늑대 아이들에게는 집과 땅이 필요하다. 하나는 사람들을 피해 인적이 드문 깊은 시골 마을에 찾아가고 아무도 살지 않아 폐가가 다 된 커다란 집을 혼자 고치고 닦는다. 또한 세 식구 반찬값 정도 아낄 요량이었던 논밭을 사력을 다해 일군다. 주어진 질서대로 살아가면 되는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늑대의 정체성을 감춰둔 사람들은 이처럼 제 삶의 터전을 스스로 일구고 닦아야 한다. 


하나의 노력은 효과를 발휘한다. 그녀에게 감복한 니라사키 노인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이제 하나에게는 감자를 나눠 먹고, 아이들 교육에 대해 의견을 나눌 ‘이웃’이 생겨난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두려워서 어두운 방 안에 아이들을 감춰야 했을 때와는 다르다. 인적 드문 산의 낡은 집과 여기에 몰려드는 사람들은 곧 늑대 아이들이 공동체에서 도태되지 않고 ‘늑대냐 인간이냐’를 선택할 수 있는 ‘심리적 터전’이 되는 것이다.


영화 <늑대아이> 스틸컷. 시골 마을에 터잡는 일은 쉽지 않지만, 해낸다. ⓒ 도호


특히 유키의 학교 친구인 ‘소헤이’는 유키가 인간의 삶을 선택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다. 그는 늑대로 변한 유키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자 “때린 건 늑대다. 유키는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늑대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폭력에는 인과 관계가 있고 거기에 말려든 게 유키 안의 인간이건 늑대이건 간에 어느 한 쪽에게 오롯이 죄를 떠넘길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소헤이는 유키의 ‘정체’를 밝히는 대신 그녀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


아메도 조력자를 만난다. 산의 주인인 ‘여우 선생님’은 아메에게 산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친다. 만약 아메가 누나 유키처럼 인간 사회에 적응하려 들었다면 “사람들을 괴롭히는 늑대는 사냥꾼에게 죽어 마땅하다”는 유아적 인식이 그의 정체성에 상처를 입히고 동화책의 내용은 자기 충족적 예언처럼 실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우 선생님은 아메가 산에서 살아남는 방법만 가르치지 않고 늑대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훌륭하게 키워가게 돕는다.


외로운 늑대가 사람을 죽였다.


늑대가 사람을 죽였다. 얼마 전 프랑스의 한 성당에 늑대가 난입해서 미사를 집전 중이던 86세의 신부를 살해했다. 신의 말을 전하며 지역 사회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노신부는 뜻밖에도 신에 대한 설교를 들으며 죽어가야 했고, 늑대들은 성당을 나서는 순간까지 “신은 위대하다”고 울부짖었다. 성당 앞에서 대기하던 프랑스 경찰기동대가 두 늑대를 사살했으나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던 것은 프랑스 국적의 무슬림 청년들이었다. 


범인들은 전문 테러 조직에 속하지 않고 자생적으로 나타난 테러리스트를 뜻하는 이른바 외로운 늑대 Lone Wolf였다. 그들은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조직인 ‘IS’ (Islamic State)에 충성을 맹세했고, 소프트타깃을 대상으로 한 최근 IS 테러 기조에 맞추어 범행을 저질렀다. 범인 중 한 명은 알제리계 프랑스인이었는데, 그가 이슬람 극단주의를 처음 접한 것은 겨우 2015년 1월쯤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왜 이렇게 빠르게 ‘극단화’ 됐을까?


프랑스의 무슬림 청년들이 경제 불황과 불평등으로 삶의 터전을 위협받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프랑스 정부가 좀처럼 불평등을 개선하지 못하고 무슬림의 불만이 높아지던 차에 소프트타깃을 대상으로 한 IS의 테러가 연달아 터졌다. 극우 세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슬림에 대한 차별과 경계를 정당화했다. 삽시간에 ‘국민’에서 ‘적’으로 내몰린 무슬림 청년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폭력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늑대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존재고, 곧 경찰에 의해 죽게 마련”이라는 분별없는 메시지가 미디어에 가득하다. 무슬림 테러범들의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거기까지 내몬 것은 지난 수십 년간의 식민 정책, 불평등, 책임 전가, 무시라는 배경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복원시킬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 외로운 늑대들이 미디어의 메시지를 자기 충족적 예언으로 받들기 전에 더 많은 소헤이와 여우 선생의 존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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