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크레디트 + 5분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의 주인공 마고(미셸 윌리엄스)는 더 완벽한 사랑을 갈구한다. 남편 루(세스 로건)과의 사랑이 사그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고뇌 끝에 새로운 남자 대니얼(루크 커비)와의 사랑을 선택한다. 그러나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난 그녀가 깨달은 것은 ‘모든 사랑은 낡기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사랑의 무상함을 깨달은 그녀의 허탈함을 담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녀는 최고의 순간에 연인과 함께 탔던 놀이기구에 저 홀로 오른다. 놀이기구에서 흘러나오는 Video killed the radio star에 온몸을 내맡긴 그녀의 표정은 오묘하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과연 놀이기구는 멈출까. 그녀는 앞으로도 저 홀로 놀이기구에 탈 수 없는 것일까. 우리도, 사랑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엔딩크레딧 그 후 5분을 재구성해봤다.
마고는 한참만에야 놀이기구가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번이고 반복되던 음악이 멈추고 놀이기구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어느새 어둑해진 놀이공원의 풍경이 놀이기구의 회전축을 중심으로 눈앞에서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남자가 놀이기구 속도에 맞추어 마고를 뒤따라오고 있었다.
“괜찮아요?”
남자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지만 유람선을 쫓는 갈매기의 울음소리처럼 말끝이 볼품없게 늘어졌다. 그새 지쳐 회전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고는 대답대신 큰 소리로 웃었다.
“다행이네요”
무릎을 굽히고 숨을 몰아쉬던 남자가 이번에는 마고를 마주보고 나타났다. 마고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그를 자세히 바라봤다.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그는 놀이기구 관리자 복장을 하고 있었다. 마고가 탄 놀이기구가 휙 지나쳐가자 그도 다시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전원 장치가 고장이랍니다! 수리중이라니까...”
마고는 어느새 다시 뒤쳐지는 남자를 보고 또 한 번 가슴이 찢어질 듯 웃어댔다.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한 번 웃기 시작하면 멈추기가 어려웠다. 덕분에 비집고 나온 눈물이 그렇잖아도 뿌연 눈앞을 가렸다. 남자가 계속 뭐라고 외치는데 두 바퀴를 돌 동안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가까스로 진정한 마고가 남자와 마주칠 때에 맞추어 소리를 질렀다.
“괜찮아요. 그렇게 애쓸 필요 없어요.”
그렇게 애쓸 필요 없다. 제까짓 게 언젠가 멈추겠지. 멀미를 하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는 했지만 곧 해결책을 찾았다. 빠르게 돌아가는 놀이기구 바깥 풍경을 구태여 분간하려 들지 않으면 견딜만했던 것이다.마고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그래. 애쓸 필요 없어.”
딱 하나 거슬리는 것은 뿌연 장막처럼 흐려진 놀이기구 너머 세상에서 그녀를 따라 달리고 있는 남자였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물방울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 그 남자만은 마고를 따라 뛰며 선명함을 유지했다. 남자는 쾌활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래요. 눈을 감으면 조금 나을 거예요.”
곁눈질로 바라본 남자는 걱정스런 표정을 짓다가도 때로는 또 웃고 있었다. 하기야 제 몸에서 흐르는 땀방울에도 간지러워서 웃지 않고 못 견딜 때 아닌가. 마고는 남자의 웃음이 그녀가 참지 못하는 웃음과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 쪽도 눈 좀 감고 좀 쉬어요...”
마고는 남자가 듣든 말든 상관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더 큰 소리를 내기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 그녀는 놀이기구가 점점 더 안정적인 궤도로 접어든다고 느꼈고 그에 비례해서 몸이 점점 나른해짐을 느꼈다. 저 바깥세상과 다른 기이한 행성의 중력에 빠져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질적인 무게감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쾅-
마고가 눈을 떴을 때 옆자리에는 어느새 젊은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아니 그가 원래 등으로 앉는 자세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면 ‘구겨져 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남자가 구겨진 종이를 펴듯 바스락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렇게 무리할 것까지는 없었는데.”
“걱정하실까봐.”
자리에 앉은 남자는 생각보다 더 정돈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근육 하나 없이 실팍하지만 어디 하나 비틀린 곳 없이 가지런했다. 풋내 나는 얼굴과는 달리 신뢰가 가게 만드는 몸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뛰어든 게 더 걱정인데요.”
그렇게 말은 했지만 마고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싫지 않았다. 남자 또한 기죽지 않고 마고에게 말을 걸어왔다. 혼자 왔느냐. 이 놀이기구를 좋아하느냐. 만나는 사람은 있느냐는 등의 시시껄렁한 이야기만 늘어놓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정돈되는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아니 익숙한 기분이었다.
Video Killed the radio star
터진 수도관에서 물이 흘러나오듯 스피커에서 음악이 쏟아졌다. 남자가 익살스럽게 웃었다.
“아, 저놈의 스피커는 오락가락하네요.”
“그렇죠, 오락가락...”
마고는 갑자기 삶이 더디게 흐르는 것을 느꼈다. 놀이기구가 서서히 느려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윽고 놀이기구가 완전히 멈춰 서자 그녀의 몸도 제자리에 멈춰 섰지만 계속 흐르려는 관성만은 몸 안에 남아 있었다.
“이게 늙는 거구나.”
“예?”
“아니에요.”
마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놀이기구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잠시 이대로 쉬고 싶었다. 그런 마고를 보며 어린 남자는 뭔가 의무감을 느꼈다.
“오늘, 저녁 같이 할래요?”
마고는 다시 한 번 미친 듯이 웃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리고는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한 기분으로 말했다.
“됐어요. 혼자 쉬고 싶네요.”
마고는 정신을 차리고 나면 대니얼에게 인력거를 태워 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