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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인칭 Oct 21. 2016

박카스 아줌마를 다룬 영화 <죽여주는 여자>리뷰

죽을 날만 기다리는 존재는 없다.

코끼리 무덤이라는 게 있다. 지상 최대 생물 코끼리는 죽을 때가 되면 소리 없이 무리를 떠난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오랜 세월에 거쳐 선대 코끼리들이 죽음을 맞이한 장소다. 선대가 그러했고 후대가 그랬듯 죽음을 앞둔 코끼리들은 여기에서 가만히 죽음을 청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유골이 쌓이고 쌓이면 가히 ‘무덤’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만들어진다.


코끼리 무덤이라는 건 사실 없다. 상처입고 병들어 죽어가는 코끼리가 한 자리에 모여드는 것은 물과 먹이 때문이다. 건강한 코끼리는 서식지 주변을 배회하다가도 언제든지 물과 먹이를 찾아올 수 있지만 죽어가는 코끼리는 그럴 수 없다. 때문에 풀이 자라는 물가 근처에 모여 있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살기 위해 끝내 노력하지만, 그게 잘 안 된 것이다.


그럼에도 ‘코끼리 무덤’이라는 말이 퍼진 것은 밀렵꾼 때문이다. 밀렵꾼들은 코끼리를 몰이 사냥해 상아만 빼돌리고 나머지 사체는 방치한다. 이 경우 유골이 부자연스럽게 모여 있게 되는데 이게 ‘무덤’처럼 보인다. 이에 비하면 자연사한 코끼리의 사체는 코끼리를 비롯한 야생 동물들에 의해 사방으로 흩어져 분해된다. 오히려 이쪽이 나름의 ‘장례 절차’인 셈이다.


결국 코끼리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죽지 않는다. 코끼리 무덤이라는 전설은 코끼리의 지혜를 칭송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죽음을 은폐하고 지속하게 만든다.


욕망을 죽여주는 여자, 박카스 아줌마


'박카스 아줌마' 소영(윤여정)이 '몸을 파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이다.  ⓒCGV 아트하우스


종로 탑골공원에도 코끼리들이 모여든다. 죽음을 준비하러 모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생생하게 욕망하며 삶을 이어 나간다. 소일거리를 멈추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서 술판을 벌이거나 장기를 둔다. 가판대에는 낱담배와 부탄 캔을 판매하고, 싸구려 장급 여관이 여전히 즐비하다. 늙고 병들어 거동이 불편해진 코끼리들의 ‘서식지’다.


그 가운데 ‘박카스 아줌마’가 있다. 박카스 아줌마의 존재는 노인들이 여전히 욕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박카스 아줌마는 여전히 노인들을 ‘죽여준다.’ 보다 정확히는 젊은 시절의 왜곡된 그것으로 고정되어 있는 노인들의 욕망을 죽여준다. 이재용 감독의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박카스 아줌마가 ‘죽여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죽여주는 여자>에서 윤소영(윤여정)은 박카스 아줌마다. 종로에서 노인들에게 박카스를 따주며 ‘몸을 팔지만’ 그 이전에는 오랜 세월 미군 병사를 상대했던 ‘양공주’였다. 지난 50년간 공주에서 아줌마로 변했을 뿐, 한국 사회에서 그녀의 역할은 변함이 없다. 왜곡되고 분출되지 못하는 욕망을 죽여주는 일이다.


탑골공원을 찾는 노인들에게 소영은'더러운 여자' 가 아니라 '더러운 욕망'을 투사해도 되는 여자다.  ⓒCGV 아트하우스


양공주, 기지촌 여성들은 미군을 상대했다. 그러나 그들 등을 떠민 욕망은 한국인의 것이었다. 한국은 미군의 ‘힘’을 필요로 했고 그 힘에 수반되는 저열한 욕망을 거부하는 대신, 소위 양공주에게 미군의 욕망을 죽여주는 일을 맡겼다. 여성의 자유보다 ‘정절’이 도덕 우위에 있다는 도덕관념은 그대로 둔 채 우리가 ‘더러운 일’로 부르는 일에 떠밀었던 것이다.


‘더러운 여자’ 소영의 삶이 순탄했을 리가 없다. 꼬리표를 떼지 못한 소영은 여전히 몸을 ‘팔며’ 음지로 숨어들었다. 반면 한국 사회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놀랍도록 부풀어 올랐고 남성들은 그 주역이 되어 자부심 가득한 삶을 살았다. 한강의 거품이 꺼진 2016년, 젊은 시절의 그릇되고 부푼 욕망을 고스란히 간직한 남성들은 다시 소영의 손을 빌린다.


박카스 아줌마는 관성처럼 그들을 죽여준다.


죽여 달라는 것이다. 부푼 욕망만이 아니다. 더 이상 욕망을 담을 수 없게 된 제 몸마저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이기적이지만 눈물겹다. 그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욕망과 몸을 간수토록 도와야 하는 것은 국가다. 그릇된 방향으로 부풀다가 순식간에 꺼져버린 한국 사회는 노인들에게 최소한의 소득, 의료 혜택, 존엄한 죽음을 지원할 형편이 안 된다.


소영은 마치 관성처럼 그들을 ‘죽여준다.’ 국가가 하지 못하는 일, 국가가 하지 않는 ‘더러운 일’이 자기소임이라는 듯이 삶이 버거운 노인들을 대신 죽여준다. 사실상 소영에게 모든 죽음을 의뢰한 재우(전무송)은 자신의 죽음마저 부탁하며 남은 돈을 모두 건네주기까지 한다. 화대다. ‘꽃’이라 대상화하여 소영의 성을 사던 돈으로 소영의 존엄마저 산 것이다.


못할 짓이다. 자기 삶과 죽음을 간수할 여유도 없는 소영에게 죽음을 부탁하는 것이나, 그렇게 해서라도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재우나 모두 눈물겹다. ‘전쟁 둥이’ 소영이 살아온 66년은 대체 어떻게 돼먹은 세월이기에 때를 알고 소리 없이 죽어가는 ‘가짜 코끼리 전설’ 같은 최후를 맞이하는 것일까. 살아보려는 노력마저 하지 못하는 것일까.


트렌스젠더, 코피노, 절단장애인 . 상처는 약자인 이들을 가족처럼 이어주는 '핏줄'과 같다.  ⓒCGV 아트하우스


과거를 반추할 필요도 없다. 영화는 그 답을 소영이 마주한 현실에 마련해뒀다. 소영이 사는 낡은 연립주택에는 트랜스젠더 티나(안아주)와 절단장애인 도훈(윤계상)이 살고 있다. 한국 사회의 음지로 내몰린 이들은 ‘하자가 있는 인간’이라고 자칭하지만, 그렇기에 서로 부족한 점을 메우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들의 삶이 순탄할까. 그럴 리 없다. 소영이 살아온 66년의 질서가 그대로 반복된다면 이들은 점점 더 음지로 내몰리며 자신들끼리만 의지할 것이다. 소영을 연기한 배우 윤여정 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 꼽은 장면도 어쩌면 이들의 미래를 예언하는 것일 수 있다. 버림받은 ‘코피노’ 소년 민호(최현준)를 소영이 집으로 데리고 오는 대목이다.


집 주인인 티나가 그 아이는 누구냐고 묻지만 소영은 “주웠다”고만 대꾸한다. 그게 끝이다. 티나도 도훈도 아이에 대해 더 묻지 않는다. 버려진 삶,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삶은 서로 부둥켜안아 견뎌내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몸소 겪었기에 그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다. 따듯하지만 국가가 버리거나 외면한 것을 주워가며 살았던 소영의 슬픈 관성도 엿보인다.


죽여주는 여자, 풍문으로 남다.

'(생을)죽여달라'는 부탁을 (욕망을)죽여달라는 부탁처럼 심상하게 받아들이는 소영.  ⓒCGV 아트하우스


소영은 세 노인의 죽음을 도운 죄로 체포된다. 체포되어가는 동안에도 소영은 태연하다. 눈 오는 창밖을 보며 “겨울은 추운데 봄에 들어가면 안 되냐.”고 묻는다. 그저 욕망을 해소해준 것뿐이라는 듯 담담한 모습이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녀의 표정에는 제 삶에 대한 욕망도 후회도 보이지 않는다.


욕망이 꺾이면 삶도 꺾인다. 한국에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인이 자살하는 나라다. 이 참담한 현상은 노인을 ‘욕망하는 존재가 아니라 죽을 날 받아두고 기다리는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에 생긴다. 노인들 생의 욕망을 이해하고 해결해주는 대신 ‘코끼리 무덤’으로 걸어 들어가기를 은근히 부추기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노인 빈곤률을 방치했던 것이다.


노인들을 ‘코끼리 무덤’ 전설 속으로 밀어 넣은 밀렵꾼은 누구인가. 영화 마지막 장면에는 교도소에서 사망한 소영이 무연고 시신으로 분류되는 장면이 나온다. 티나와 도훈의 존재를 생각하면 퍼뜩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와 제도를 대신해 그릇되게 범람하는 욕망을 처리해 온 그녀의 생을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다른 노인들처럼 그녀 역시 잊힌 것이다.


‘죽여주는 여자’의 사체는 코끼리 무덤 전설처럼 풍문으로만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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