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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ther kim Aug 20. 2020

"나의 글은 다만 글이기를 바랄 뿐"

연필로 쓰기 - 김훈

P. 52

아이가 아프고 젊은 엄마가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누항의 일상이 이처럼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나는 70살까지 산 것이다. 이것을 알았으니 70년 세월은 헛되지 않았구나 싶었다. 

병이 다 나은 아이들은 놀이터에 나와서 논다. 아이들은 걸어갈 때도 춤추듯이 걷는다. 어떤 아이들은 옆으로 뛴다. 아이들의 생명은 리듬과 율동에 실려 있다. 그 생명의 힘이 몸의 기쁨으로 표출되면서, 아이들은 걸을 때도 춤춘다. 나이를 먹으니까 나 자신이 풀어져서 세상 속으로 흘러든가. 이 와해를 괴로움이 아니라 평화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온전히 늙어간다. 새로운 세상을 겨우 찾아낸다. 

나는 말하기보다는 듣는 자가 되고, 읽는 자가 아니라 들여다보는 자가 되려 한다. 나는 읽은 책을 끌어다대며 중언부언하는 자들을 멀리하려 한다. 나는 글자보다는 사람과 사물을 들여다보고, 가까운 것들을 가까이하려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야, 보던 것이 겨우 보인다. 


P.142

동물들은 문명이나 제도, 언어나 관습의 보호를 받지 않고, 앞선 세대로부터 아무런 기록이나 유산을 물려받지 않는다. 동물들은 오직 제 몸뚱이 하나로 제 몸뚱이를 먹여 살리거나 강자의 먹이로 내어주면서 번식과 죽음과 기아와 명종의 수백만 년을 건너간다. 생명의 전개는 고통이나 기쁨, 영광이나 치욕 같은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장엄하고, 그들의 생명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감당하는 개별적 실존으로서 존엄해 보였다. 그리고 그 종족과 개체들의 몸은 언제나 완벽한 사실성으로 긴장되어 있었고, 그것들의 몸동작에서는 자족한 생명의 리듬이 흘러나왔다. 


P. 143

사자는 시선을 자꾸 바꾸지 않고 한 방향을 오래 바라본다.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을 때도 사자의 시야는 넓어 보이고, 그 시력은 지평선 안쪽 전체를 읽고 있는 것 같다. 


P. 145

원숭이는 사람처럼 앞발로 상대를 안고 쓰다듬는다. 몸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동작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앞발을 애정 표현의 중요한 도구로 쓰는 걸로 봐서 인간과 원숭이는 분류계통상 친연관계가 확실해 보인다. 팔과 손이 없고, 팔과 손에 마음을 전하는 기능이 없다면 인간의 애정행위는 허전하고 불완전하다. 사람과 원숭이가 친연관계가 있다고 해서 인간의 고귀함이 훼손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은 인간 스스로에 의해 더럽혀진다. 몸에는 자연과 생명의 경계선이 없다. 모든 몸은 빛나는 몸이다. 모든 몸은 ‘real’하다. 


P. 147

그리움이나 기다림도 love가 아니라 할 수는 없지만, 부재와 상실은 real에 미달한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고 당신을 기다린다고 할 때,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몸,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얼굴, 당신의 팔다리가 내 눈앞에 나타나서 당신이 나의 real이 되기를 기다린다는 말이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한다고 말할 때, 나는 당신의 real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말은 그리움을 끝내고 싶다는 말이다. 당신이 나의 real일 때 나는 당신의 real이다.


P. 218

여름 점심때 잘 익은 오이지를 반찬으로 해서 찬밥을 먹으면 입안을 청량하고 더위는 가볍다. 


P. 219

글자를 들여다보고 짐작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빨로 씹어서 관능으로 먹는다. 초복이 지나서 날이 볶듯이 더워진 연후에야 오이지의 청량함은 더욱 푸르르다.


P. 223

그 반찬 속에서 삶의 미립자들은 반짝인다. 


P. 240

별을 별이라고 부를 때, 별은 내 가슴에 박히고 나는 모국어의 자식임을 스스로 안다. 


P. 241

그후 한국어에 대한 내 생각은 많이 바뀌어서, 조사가 얽어내는 구문의 헐거움이 오히려 한국어가 갖는 자유의 공간이며, 이 공간을 잘 활용함으로써 다양한 표현과 논리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모국어는 친숙할수록 긴장을 요구한다.


P. 250

영화 <말모이>를 보면서 나는 이 두편의 시를 생각했다. 가보지 않은 마을들의 산천과 말씨가 내 마음에 떠올랐다. 한국인은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한국의 어느 사투리라도 다 알아들을 수 있다. 


P. 263

나보다 5-10살 정도 연상인 세대에 한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노인들이 많았다. 남성보다도 여성 노인들의 문맹이 더욱 심했다. 조혼, 육아, 남녀차별, 가사노동, 생산노동, 시집살이처럼 여성의 생애에 유습된 억압이 그 배경이었다. 

기록된 역사가 없는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한다는데, 이 문맹 노인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 현대사 속에서 전쟁, 이산, 이농, 기아, 가난, 억압의 시대고를 개인의 삶으로 치러냈고 한 시대 전체의 무늬가 나이테처럼 몸에 쟁여져 있고 옹이로 박혀 있지만, 그들의 생애는 당대사에 편입되지 못하고 선사의 지층 밑바닥에 매몰되어 있었다. 


P. 278

나는 할매들의 글을 읽으면서, 고난에 찬 한 시대를 살아낸 여성들의 생애와 아무도 편들어주지 않던 그들의 작은 몸을 생각했다. 할매들은 그 몸을 시대의 밑바닥에 갈면서 살아냈다. 이념은 야만과 억압을 풍속으로 만들어서 개인을 보편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할매들의 글을 읽으면서, 한 문명 전체가 여성의 생명에 가한 야만적 박해와 차별을 성찰하는 일은 참혹하다. 그리고 그 야만 속에서도 생명의 아름다움을 보전해온 할매들의 생애 앞에서 나는 경건함을 느낀다. 


P. 338

말을 섞어서 휘저어놓으면 웅성거림만 남아서 누항은 언제나 수군거린다. 

인류문화의 가장 아름답고 신뢰할 만한 부분은 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말은 인간이 저지른 대부분의 죄악에 개입했거나, 그 죄악 자체다. 이제, 말은 소통에 기여하기보다는 인간 사이의 단절을 완성시키고 있다. 말은 말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P. 339 

아이와 마주치는 것은 이 누추한 거리의 행복이다. 

약국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하품할 때 입안을 들여다보았더니, 분혼빛 잇몸에서 새싹 같은 젓니가 돋아나오고 있었다. 젖니는 하얀 별처럼 보였다. 젊은 엄마는 아이의 입술을 벌리고 젖니를 들여다보면서 웃는다. 젊은 엄마의 웃음은 맑았다. 아이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작고 붉은 입을 오물거리며 옹알옹알했다. 아이는 매우 요긴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의 입속에서 말은 젖니처럼 돋아나고 잇었다. 나는 좋아서 웃었다. 젊은 엄마는 내가 왜 웃는지를 모른다. 나는 기뻤지만, 이 악악대고 웅성거리는 거리에서 나의 기쁨은 무력했다. 


P. 342

밤하늘의 별은 우륵이 보았던 바로 그 별이고 또 지금의 별이니까 별은 가장 확실한 자료다…. 나는 별을 보고 했다….. 이런 말씀이었다. 


P. 349

별을 향해 탐사선을 보내는 인간의 꿈과 별들을 엮어서 그림을 그리는 인간의 꿈과 별들 사이를 흐르는 음악을 끌어당기는 인간의 꿈은 다르지 않다. 


P. 353

물감을 섞는 화가의 팔레트를 들여다보면서 나는 수액과 재료를 섞어서 색과 향기를 만들어내는 식물의 내면을 생각했다. 내 마음이 식물의 마음으로 건너가서 동물인 나는 식물의 자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생명은 신선했고, 시간은 순결했다. 나는 피부에 잎파랑이가 돋아나서 빛과 물을 받아 두 팔을 벌리고 스스로 광합성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몽상을 느꼈다. 

나무는 폐허와 신생을 동시에 살아간다. 나무는 해마다 늙어가고 해마다 젊어진다. 젊음, 늙음, 삶, 죽음, 과거, 현재처럼 인간의 어휘로 규정되는 시간의 구획이 나무에게는 없다. 나무는 나무의 시간 속에서 산다. 나무는 자연의 시간을 받아들여서 저 자신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P. 364

뜬 공을 향해 몸을 날릴 때, 그리고 다시 땅에 내려와 달을 때, 나는 내 몸의 한계와 속박 속에서 자유로웠다. 속박과 그 속박을 벗어나려는 꿈이 이 아름다운 동작을 빚어낸다. 그러나 공 차는 사람은 그 동작의 아름다움을 의식하지 못한다. 다, 저절로 되어진다. 

공차기의 행복은 공 차는 사람은 보는 일의 행복과 같다. 


P. 365

내 발길질이 공을 걷어낼 때, 공은 새로운 질감과 방향으로 튕겨져나간다. 그렇게 튕겨져나간 공은 저쪽에서 달려들고 있는 다름 사람의 발길 앞에 또다시 새로운 질감의 시간을 선사한다. 공이 몰고 오는 이 새로운 시간은 몸속의 시간이 몸밖으로 뛰어나와 굴러다니는 것처럼 신기하다. 그래서 공은 살아 있는 생명이다. 


P. 373

공은 거기에 가해지는 발길의 힘을 정직하고 순결하게 받아들이면서 튕겨져나가지만, 공에는그 힘의 흔적이나 승부의 기억이 묻어 있지 않다. 공은 만인의 몸의 동작을 정확하게 받아내지만, 스스로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는다. 그 공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매개한다. 공을 쫓아서 달려가는 인간을 바라보면서 나는 둥글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둥근 것은 거기에 가해지는 힘을 정직하게 수용하고, 땅에 부딪히고 비벼지는 저항을 순결하게 드러내서, 빼앗기고 뺏는 동작들 사이에 적대관계를 해소시킨다. 


P. 375

경기장뿐 아니라 도시의 황폐한 공터나 뒷골목, 남루하고 억눌린 삶의 오지에서 사람들은 공을 차고 있었다. 공은 억압할 수 없는 생명의 충동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공을 차면서, 공 차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믿는다.


P. 384

우리네 사람들이 화나서 모이면 무섭고, 순할 때는 이처럼 착하니 무섭고 착한 것이 다 나라의 복이다. 


P. 385

맛은 음식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동안만 그 실체가 살아있고, 먹고 난 후에는 만질 수 없는 기억이나 그리움으로 마음의 밑바닥에 깔린다. 


P. 439

또 겨울새들이 돌아오는 날 호수공원에서 작은 잔치를 열어서 새를 귀하게 여기고 기쁨으로 맞이하는 마음들을 넓혀갔으면 좋겠다.

우리는 타향 위에 고향을 건설해야 한다. 


P. 441

바다가 끝이 없고 시간이 매순간 새로워서, 구태여 글을 쓰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새로운 것들을 맞느라고 빈둥거리면서, 바쁘게 지냈다. 


P. 442

우주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힘을 고래가 전해주고 있었다. 고래는 새로운 시간의 바다에서 뛰고 있었다. 나는 잘한 것도 없이 다만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큰 상을 받은 느낌이었다. 


P. 449

자연으로서의 시간은 다만 전개될 뿐, 그 전개의 방향에 도덕적 목표가 없고 진화의 충동이 없다. 그 진행의 궁극에 관하여 인간은 영원히 아무것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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