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곳으로 - 최진영
P. 11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살던 집은 우리 집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이 대출이 끝나면 저 대출이 시작되었을 것이고 이따금씩 우리는, 힘들어 죽겠다는 말로 죽음을 밀어냈을 것이다. 고요하게 담담하게 각자의 인생을 삭감해 나갔을 것이다.
P. 64
분명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데, 최선이 답을 아니란 생각이 세금 고지서처럼 주기적으로 날아들었다. 삶이 마디마디 단절되어 플렀다. 직장에서의 나와 아이들 앞에서 나와 단을 대할 때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내가 징그러울 만큼 달랐다. 나라는 사람이 흐트러진 퍼즐 같았다. 애초의 내가 어땠는지 밑그림은 기억나지 않았고 퍼즐은 흩어진 채 여기저기 떠돌았다. 무언가 미세하기 어긋나고 있어서 먼 훗날 완벽하게 분리될 것만 같았다. 나와 내가. 나와 단이. 나와 아이들이.
P. 71
사람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집엔 언제 가느냐고 해민이 또 묻는다면 대답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 설명해야 한다. 미루는 삶은 끝났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