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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ther kim Aug 27. 2020

나 자신을 마주한다는 것

친절한 금자씨와 Silver Linings Playbook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일은 나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 아닐까.

지난달 나의 신용카드 사용내역을 확인하는 것.

늘어가는 몸무게를 체중계의 눈금을 보며 확인하는 것.

중고등학교 때 썼던 일기나 미니홈피 글들을 읽어보는 것.

내가 했던 못된 말과 행동들을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것.

거울 속에 비친, 조금씩 변해가는 나의 표정선을 쳐다보는 것.

내가 과거에 했던 일들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나를 어서 버리자고, 어서 새롭게 태어나자고만 한다. 하지만 과거의 그 비정상적이고 힘들었던 시절을 마주할 수 있는, 그때 그 모습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지난 학기 동안 과제와 중간중간 머리 식히기용으로 3개월 내내 머릿속에 붙잡고 있게 된 영화와 소설이 있는데, 그 둘이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와 Matthew Quick의 Silver Linings Playbook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지겨우리만큼 자주 돌려보는 영화인데 볼 때마다 다른 이야기를 마주하게 되는 영화이다. 전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복수와 구원을 갈구하는 금자씨, 그리고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하는 그런 불행한 이야기로만 이해를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Silver Lingings Playbook 때문이었을까,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금자씨는 백 선생에 대한 복수와 그것을 통한 용서를 끝없이 갈구하는 여자이다. 그녀의 화려하고도 처절한, 그리고 참으로 열과 성을 다하는 복수에 비장한 아름다움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하지만 그녀가 복수에 대해 가진 확고함에 비해, 그녀는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누구로부터 용서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고 있다. 그녀는 출소를 하자마자 다짜고짜 원모의 부모 앞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며 용서를 빌고, 매일 밤 원모에게 정성스러운 용서의 기도를 올린다. 하지만 금자는 원모를 죽이지도, 그 죽음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도 않았다. 그녀 또한 딸이 인질로 잡힌 피해자로서 백 선생의 죄를 뒤집어써야 했던 억울하고도 철없던 어린 여학생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실상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해서 남에게 용서와 구원을 갈구한다. 금자는 백 선생에게 복수할 날만을, 원모를 만나 용서를 구할 날만을 뜨겁게 기다리고 꿈꾼다.


 하지만 영화는 금자가 그토록 꿈꿔오던 두 만남 중 어느 것도 클라이맥스로 그리지 않는다. 백 선생에 대한 복수는 처절하지만 느리게 진행되고 그녀가 기대하고 상상했던 통쾌함과 짜릿함에 비해 그 과정은 서서히 무겁게, 그리고 허무하게 끝이 난다. 복수는 끝이 났지만, 변한 것은 없다. 백 선생을 죽임으로써 모두가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떠난 아이들이 돌아온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복수에 가담한 부모들은 자유를 잃은 사람들 마냥 금전관계를 계산하며 이번 일을 누군가가 발설할까 조마조마해한다. 금자는 화장실에서 붉은 눈 화장을 지우다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다 커버린 원모의 영혼을 만나지만, 원모는 그녀를 구원해주지 않는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백 선생을 마주하는 것도, 원모를 마주하는 것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녀는 다른 누구의 용서가 아닌, 자신으로부터의 용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금자는 철없는 선택을 했던 과거의 자기 모습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출소하자마자 다짜고짜 원모의 집을 찾아갔던 것도 당장의 용서가 절실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며 어떠한 감정의 미동도 보이지 않던 금자가 비로소 목 놓아 눈물을 쏟아내며 스스로 자유로워진 건 자신이 만든 하얀 두부와 같은 케이크 앞에서이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그녀는 자신을 마주함으로써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친절한 금자씨와 함께 계속 읽었던 책이 Silver Linings Playbook이다. 영화가 원작보다 더 리듬감 있고 낫다는 평이 꽤 있지만, 역시 나는 주인공 Pat의 심리가 더 깊게 느껴지는 책이 더 좋았다 (스토리도 약간 다르다. 이 다른 스토리마저도 책이 더 맘에 든다).

 Pat은 부인의 외도를 아주 충격적이게 목격한 후 극심한 조울증으로 정신병원/수련원에서 긴 시간을 보내고 나온 환자이다. 그는 한 곳에서 오래 갇혀 치료를 받고 나온 터라 자신이 사회생활을 못했던 지난 몇 년 간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것은 물론, 자신이 정신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일들 조차 모두 잊어버린 상태이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그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오직 자신의 전부인 Nikki만을 위한 것들이다.

 하지만 사실, 그는 그녀에게 어떠한 용서도 구할 필요가 없다. 바람을 핀 것도 모자라 Pat의 재산까지 가져간 사람은 그의 전부인인 Nikki이다. 그녀는 Pat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얼마나 “나아진” 사람이 되었는지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Pat은 Nikki가 싫어했던 자신의 과거 모습을 경멸하고 다른 누구도 아닌 재혼해서 잘 살고 있는 Nikki를 위해 새롭게 태어나고자 한다.

 그는 풋볼 경기장에서 화를 돋운 상대팀 팬과 피 터지게 싸우고 난 후, Nikki를 떠올리며 이런 자신을 그녀가 보면 얼마나 싫어할지부터 걱정한다. 이런 그를 보며 Tiffany는 말한다.


“The Giants fan sounds like a total prick, as do your brother and your friend Scott. You didn’t start the fight. You only defended yourself. And if Nikki can’t deal with that, if Nikki won’t support you when you are feeling down, then I say fuck her.”


 사실 나도 Tiffany가 이 말을 하기 전까지는 Pat의 긍정적인 마음과 Nikki와의 화해를 마냥 응원했었다. 하지만 가만 보면 Pat은 언제나 Nikki의 반응만 생각할 뿐 지금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는 돌아보지 않는다. 자신이 과거에 왜 그런 행동을 했었는지, 자신이 왜 화가 났었는지. Nikki를 떠나도록 한 자신의 잘못된 행동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한 잘못된 행동, 지금의 그도, 과거의 그도 얼마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는 깨닫지 못한다. 그는 예전의 비정상적이었던 심리와 어쩌면 지금까지도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하나로 뭉뚱그려 경멸하고 지우고만 싶어 하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Pat은 자신의 조울증을 끝까지 부정한다. 그는 Tiffany를 보며 자신보다 더 미치광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그를 보며 영화 속 Tiffany는 이런 말을 한다.


“I was a slut. There will always be a part of me that is dirty and sloppy, but I like that, just like all the other parts of myself. I can forgive. Can you say the same for yourself, fucker? Can you forgive? Are you capable of that?”


 Pat은 자기가 하는 모든 행동의 주인은 자신임을, 자신이 정신병원이란 곳에 오랜 기간 지냈었고 아직도 약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임을 드디어 마주하게 되고 이런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Tiffany를 통해 Nikki의 틀을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과거와 현재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금자씨와 Pat처럼, 우린 남을 통해서 나를 비춰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이 Pat과 Tiffany처럼 아름다운 관계라면 좋겠지만, 보통은 자신을 더 미워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내가 했던 행동을 누군가가 용서해주길, 지금 변한 내 모습을 누군가가 좋아해 주길. 내가 나를 받아들이기보다는 남들이 나를 받아들여줄지를 우선하며 내가 나를 돌아보길 회피한다. 그것에 맞추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숨기고 부정하며 살았던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 정말 좋은 것이다. 잘못됐던 과거의 모습을 고쳐나가는 것. 정말 너무 좋은 것이다. 하지만 힘들었던 시절과 바보 같았던 스스로의 모습을 부정할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 조여 오고 과거에 묶여있을 뿐이다. 과거의 나를 미워하고 지금의 부족한 모습을 부정해야 새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변할 수 있을 때는 과거의 나를 알고 이런 나를 마주했을 때. 진정으로 내가 나 자신을 용서했을 때이고 나를 사랑했을 때이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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